디자인, 디자이너

내 직업적 정체성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가끔 계신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나는 나의 직업적 정체성이 ‘디자이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한데, 내가 가진 프로그래밍이나 기타 여러 능력들이 보잘 것 없는 수준인 반면 내가 가진 디자인 능력은 나의 다른 능력들에 비해 몇 배는 낫기 때문이다.

나의 직업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함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한다’는 격언에 따라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몇 번의 글을 통해 정리해 보겠다.

디자인

나는 어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을 두 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퍼뜨릴 어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만든 가치를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면 제품 개발은 전자에 마케팅은 후자에 대응 시킬 수 있을 것이고, 학자가 하는 일이라면 연구를 통해 지식을 만드는 일을 전자에 책이나 논문으로 출판하는 것 후자에 대응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치를 잘 만들었으나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나, 사람들에게 퍼뜨리기는 잘 하지만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것을  퍼뜨리는 것 모두 좋은 결과를 이루기는 어렵다. 좋은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을 모두 잘해야 비로소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가치를 만드는 일은 다시 가치를 구성하는 과정과 그것을 실체화 하는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나에게 디자인이란 ‘가치를 목적에 맞게 구성하거나 발전시키는 과정’의 일을 의미한다. –프로그래밍이나 아트 같은 작업은 구성된 가치를 실체화 하는 과정의 일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디자인을 문제 해결에 비유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옳다고 생각하는데 가치를 구성해 내지 못하는 문제 해결은 그저 문제 풀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 문제 잘 푸는 사람을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디자인을 ‘설계’에 대응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만 옳다고 생각하는데, 디자인이 실체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기는 하지만 한 번 계획을 세운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화된 결과물을 보고 꾸준히 개선하는 과정 자체를 디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가치를 실체화 되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 어떻게 동작할지에 대한 것 등– 의 일이며 디자인의 가치는 오로지 실체화된 결과물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디자인의 가치가 실체화된 결과물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디자인을 하려면 디자인을 일단 실제 결과물로 만들고 이를 개선 하여 다시 만들고 이를 다시 개선하고의 과정 –때로는 밥상 뒤엎기도 해야 한다– 을 끊임 없이 거쳐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필휘지의 명필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한 한 번에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며 끊임 없이 피드백을 받으며 디자인을 발전시켜야만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을 오래도록 쌓아가면 언젠가는 디자인에 있어 일필휘지의 명필 수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선 그림을 많이 그려봐야 하는 것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 별로 복잡해 보이지 않는 루이스를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했는지 알면 다들 놀랄 것이다. 솔직히 나 스스로도 놀랐다.

디자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좋은 디자이너라면 가치를 구성 하거나 발전 시킴에 있어 눈에 보이는 부분을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행태는 구조에서 비롯한다. 구조에 대한 이해와 개선 없이 행태에 초점을 맞춘 가치는 일시적일 뿐 지속성이 없다.

디자이너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디자인은 디자이너만 하는 것이 아니며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축구 경기에서 수비수라고 수비만 하거나 공격수라고 공격만 하지 않는다. 수비수도 공격 상황이 되면 올라가서 공격에 가담하고, 공격수도 수비 상황이 되면 내려와서 압박을 돕는다. 수비수가 수비만 하고 공격수가 공격만 하는 팀은 망한다. 모든 팀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훌륭한 팀이 된다.

공격수가 공격을 책임지고 수비수가 수비를 책임지 듯,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디자인 과정에는 모든 팀원이 함께 해야 한다. 다양한 피드백이 디자인을 더 좋게 만들 듯이 다양한 역할을 하는 다양한 팀원들의 시각이 더해질 때 디자인은 더욱 좋아진다.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이 디자인에 참여 하듯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이 아닌 일에도 참여 해야 한다. 간단한 스크립트 작업을 통해 프로그래머의 일을 덜어주는 것이 그 한 예인데, 이는 프로그래머가 디자이너의 자잘한 요구 사항을 모두 구현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기능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프로젝트의 효율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빠르게 확인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이 내용을 ‘디자이너는 프로그래밍을 배워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글을 쓸 예정이다.

제품을 디자인 하는 것만 디자인이 아니다. 디자인은 어느 작업에나 녹아 있다. 프로그래머나 아티스트가 자신의 결과물을 개선하는 과정도 분야와 층위는 다르지만 일종의 디자인이다. 이미 누구나 디자인을 하고 있으며,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이 아닌 일을 한다. 현실 세계의 일이 늘 그러하듯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디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작업은 많은 경우에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게 마련이다. 어쨌든 기능이 갖춰지면 제품은 완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조직에서 디자인에 투입하는 비용은 아끼게 되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디자이너라도 이미지를 다루거나 스크립트를 다루는 것과 같은 눈에 보이는 일을 하는데 역량을 집중하여 형편 없는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문제는 디자인의 가치를 이해 못하는 리더의 문제에 가깝지만 개별 디자이너들 역시 자신의 핵심 역량은 겉으로 드러나는 스킬셋이 아닌 디자인 자체에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ssba]

The author

지성을 추구하는 디자이너/ suyeongpark@aby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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