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기원/ 디자인 공간: 게임에서 경제까지

  •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가정
    • 경찰이 두 명의 범죄 공범자를 별실에 가두어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도록 한 상태.
    • 두 명의 용의자가 모두 침묵하면 둘 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남.
    • 한 명의 용의자가 침묵한 상태에서 다른 용의자가 상대방의 범죄를 시인하면, 침묵한 용의자는 높은 형량을 받고, 밀고한 용의자는 석방 됨.
    • 두 명의 용의자가 모두 상대방의 범죄를 시인하면, 둘 다 약간의 형량을 받는다. 복잡계 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미시간 대학의 로버트 액설로드는 죄수의 딜레마를 ‘사회과학계의 이콜라이(E.coli, 대장균)와 같은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 생물학자들이 박테리아균, 초파리 등 여러 단순한 유기체들을 가지고 첫 실험을 한 후 본격적으로 인체에 적용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간단한 경제 모델을 사용하여 경제 활동에 대한 지식을 쌓게 된다는 이야기다.

죄수의 딜레마

  • 죄수의 딜레마를 매트릭스로 그리면 아래 이미지와 같다. 아래의 보상 매트릭스에 따르면 두 용의자 모두 침묵할 때가 가장 유리함을 알 수 있다.

  • 만약 당신이 용의자이고 당신의 파트너가 어떠한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다면, 증언을 하는 편이 낫다.
    • 일단 당신의 파트너가 증언을 하지 않았다면 더욱 더 증언을 하는 편이 낫다. 보상 매트릭스를 보면 상대방이 침묵한 상태에서 당신이 침묵하면 0점이지만, 증언하면 1점을 얻기 때문이다.
    • 반면 상대방을 증언을 하는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증언을 하는 편이 낫다. 보상 매트릭스를 보면 상대방이 증언한 상태에서 당신이 침묵하면 -5점이지만, 증언하면 -2점이기 때문이다.
    • 위 경우는 두 용의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에, 두 용의자 모두 증언하고 감옥에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 그런데 이것은 용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최적은 아니다. 만일 두 사람 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면 침묵을 선택하여 석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죄수의 딜레마는 게임 이론의 한 예로, 자신만의 이득을 좇는 경우와 협력을 통해 더 큰 이득을 좇는 경우 사이의 상충관계를 보여준다.
    • 이러한 관계는 핵무기 조절, 사업 전략, 부부 관계 등 다양한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을 좇다가 전체의 이익의 이익을 놓치는 경우
    • 게임 이론은 그 이름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둘 이상의 대상, 목표, 결정 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시험 대상자들의 결정에 대한 보상 매트릭스의 제시를 통해 연구되어 왔다.
  • 죄수의 딜레마는 ‘비제로섬 게임 (non-zero-sum-game)’ 혹은 ‘비영합 게임’이라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 비제로섬 게임에서 둘 이상의 사람들은 협력을 통해 모두에게 더욱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두 사람이 의사소통을 하여 둘 다 침묵을 지켰을 경우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 “당신이 내 등을 긁어 주면 나도 당신의 등을 긁어 줄 것이다.”라는 격언은 비제로섬 게임을 잘 표현한 예라고 할 수 있다.
    • 우리는 협력을 통해 혼자서는 얻을 수 없는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 이와 반대로 제로섬 게임에서는 둘 중 한 명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한 명이 승리할 경우 다른 한 명은 반드시 패배해야 하고 두 사람 모두 승리할 수는 없다.
  • 비제로섬 게임, 그리고 이기심과 협동 간의 끝없는 긴장감은 복잡계 경제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죄수의 딜레마는 우리에게 일종의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 경제는 구성원 간 협동의 산물로서 사람들은 함께 생산을 하고 무역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만의 단기적 이익을 좇을 경우, 일터에서는 꾸물거리고 거래할 때는 상대방을 속이는 등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 심지어는 사람들이 서로를 속이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더 큰 이익을 얻고자 협력의 손길을 뻗었을 경우 상대방이 이를 어떻게 대응할지 전혀 모른다는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 산타페 연구소의 경제학자 새뮤얼 볼스는 자신의 저서 <미시 경제학>에서 인도의 작은 시골 마을 팔란푸르에서 한 농부와 가졌던 대화를 제로섬 게임의 한 예로 설명하고 있다.
    • 팔란푸르 농부들은 겨울 농작물을 파종할 때 수확량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닌,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에 파종을 시작한다. 농부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 모두가 파종을 일찍 시작할수록 많은 수확량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첫 번째로 파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 그 이유는 어느 한 논밭에 씨가 뿌려지고 나면 새들이 몰려와 순식간에 먹어 치워버리기 때문인데, 나는 그들에게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농부들이 같은 날 다함께 파종하는 것을 논의해 본적은 없었는지 물었다. 괭이질 하던 농부는 대답했다. “만약 그 방법을 알았다면 가난해지지는 않았겠지요”
  • 위와 같은 딜레마를 조화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을 경우, 게임 이론가들은 이를 가리켜 ‘변절’이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경제에서 협력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우리는 어떻나 방법으로 이와 같은 변절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죄수의 딜레마로 다시 몰아가 한 번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경험했던 용의자들에게 ‘재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결과에 변동이 있을까?
    • 이미 수차례 감옥행을 경험한 용의자들이라면 서로가 침묵하기로 협조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팔란푸르 농부들 역시 같은 날 파종하기로 결정했는데, 일부 농부들이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다음 경작기에 이로 인한 벌칙을 받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불행히도 이 논리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만약 게임이 반복되더라도 일정 횟수만 한다고 한다면 용의자들은 또 다시 변절하는 상태로 되돌아가고 만다.
    • 죄수의 딜레마에서 용의자들이 총 5회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면, 이들은 5라운드 전체를 1라운드인 것처럼 게임에 임하게 된다. 5라운드가 마지막 라운드라는 것을 알고 있는 두 용의자는 그 라운드에서 모두 협조를 거부하게 된다.
    • 심지어 4라운드에서도 같은 딜레마를 겪게 되는데, 협조한다 하더라도 5라운드에서 이에 대한 보상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4라운드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결국 게임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 그러나 실생활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게임을 하게 될 지는 미리 알 수 없다. 만약 게임을 경험하게 될 횟수가 유한하다고 해도, 그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 팔란푸르 농부 역시 그가 평생 동안 경작할 수 있는 횟수가 한정되어 있음을 알고는 있으나, 몇 번이 될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경우 게임은 균형을 잃게 되며 전형적인 경제 분석법으로는 최고의 전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게임에 임하는 다른 전략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죄수의 딜레마 경연 대회

  • 1970년대 후반, 로버트 액설로드는 전례 없는 방법을 사용해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시도했다. 그는 실험을 통해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논리 정립을 시도했는데, 이 실험은 학계에 큰 반향을 몰고 왔다.
    • 그는 수학적 분석법 대신 경연 대회를 개최하여 세계 각지에서 온 사회과학자들로 하여금 최고의 전략을 찾아내어 제출하도록 했다. 게임이 여러 차례 지속되면서 참가자들은 여러 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일부 참가자들은 매우 세심한 전략을 구사했으며, 복잡한 수학적 공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 그러나 경연 대회 우승자인 토론토 대학의 심리수학과 교수 아나톨 라포포트가 제출한 방법은 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라포포트의 전략은 이른바 ‘눈에는 눈(Tit for Tat, 팃포탯, 맞대응)’ 전략으로 일단 처음 만난 상대에게는 무조건 협조하는 편을 선택한다.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내린 결정을 보고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 만약 상대방이 협조하는 편을 택했다면, 라포포트는 그와 다시 만났을 때 협조하는 편을 택했다. 만약 상대방이 협조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면, 라포포트는 그와 다시 만났을 때 협조를 거부했다.
    • 이와 같은 단순한 전략의 성공에 놀란 액셀로드는 이 전략을 더욱 깊이 연구하기 위해 대규모의 두 번째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두 번째 대회에는 경제학, 수학, 물리학, 컴퓨터 과학, 진화생물학 등 각 학문 분야에서 명망이 높은 62명의 전문가들이 대거 참가했다. 그러나 역시 우승은 팃포탯 이었다.
  • 액설로드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단순한 전략이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전략을 누르고 계속해서 우승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팃포탯이 최고의 전략으로 증명 된 것일까? 아니면 아직 이보다 더 우수한 전략이 발견되지 않은 것 뿐일까?
    • 팃포탯 전략이 큰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몇몇 특정 전략과 대응했을 때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팃포탯 전략은 실패할 가능성도 크다.
    • 만약 두 참가자가 모두 팃포탯 전략을 구사한다고 가정해 보자. 두 사람이 모두 협조했을 경우에는 뛰어난 점수를 쌓을 수 있지만, 어느 한 순간 한 명의 실수로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두 참가자는 계속해서 서로에게 협조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 특히 핵무기 조절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액설로드는 이런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될 수 있는 재앙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냈다.
  • 액설로드는 다른 전략들을 찾아내길 원했으나, 서둘러 더 큰 경연 대회를 개최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액설로드의 동료 교수인 존 홀란드는 1970년대 중반 자신이 개발했던 컴퓨터 시뮬레이션 모델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 액설로드는 대회를 통해 사람들이 죄수의 딜레마 전략을 찾는 대신 홀란드의 시뮬레이션 진화 연산법을 통해 컴퓨터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해 가장 성공적인 전략을 찾아내도록 했다.

실리코 전략

  • 액설로드는 1987년 그간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내면서 진화적 시뮬레이션과 게임 이론을 혼합한 연구를 계속해 왔다. 최근 이 연구를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크리스티안 린드그렌으로 스웨덴 찰머스 공대에 재직 중인 물리학자다. 린드그렌의 모델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그간 학자들이 두 명의 행위자를 대상으로 죄수의 딜레마를 실험해 왔던데 반해, 그는 컴퓨터 상에서 동시에 두 명 이상을 대상으로 집단 실험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 린드그렌의 죄수의 딜레마 진화 시뮬레이션 역시 다소 단순한 이콜라이 모델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는 이를 통해 복잡한 실물 경제 체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특정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 첫째, 경쟁과 협조 간 내재적인 상충관계는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와 시스템을 상시적인 불균형 상태에 놓이게 한다. 이 때문에 협력적 구조는 실물 경제에서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개인적 구도로 변하게 된다.
    • 둘째, 린드그렌의 모델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실험하는 행위자들에게는 최적화된 결정을 내릴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상대바의 과거 선택을 기억해 내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 셋째, 행위자들의 다양한 상호 작용은 종종 예상치 못했던 복잡한 창발적 패턴의 형태로 이어지는데, 린드그렌의 모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 넷째, 가장 흥미로운 점은 린드그렌의 모델이 혁신적이라는 것이다. 칼 심스의 ‘진화하는 가상 생물체(Evolving Virtual Creatures)’ 연구처럼 린드그렌 역시 죄수의 딜레마 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략을 찾기 위해 진화적 연구 방법을 사용했다. 실제로 린드그렌 모델은 죄수의 딜레마에 관해 가능한 모든 전략이 포함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담은 방대한 디자인 공간을 진화적 방법으로 탐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린드그렌 모델의 전체적인 구조는 사실상 죄수의 딜레마와 인생 게임(the Game of Life)이라는 두 가지 게임이 혼합된 체제다. 수학자 존 호턴 콘웨이에 의해 개발된 인생 게임 시뮬레이션은 양 방향으로 눈금이 그려진 바둑판 같은 배경에서 죄수의 딜레마 실험을 한 것이다.

  • 인생 게임 규칙
    • 위 그림에서 각 네모칸은 셀(cell)이라고 부르며, 각 셀은 게임이 진행될 때마다 On이 될 수도 있고, Off가 될 수도 있다. 만약 On이라면 해당 셀은 검은색으로 칠해지고, Off면 흰색으로 칠해진다.
    • 각 셀은 직접 혹은 대각으로 맞닿은 총 8개의 셀과 인접하고 있고, 인접한 셀의 상태에 따라 다음 라운드에 상태가 결정된다.
    • 만일 인접한 셀 중에 On으로 표기되어 있는 셀의 숫자가 정확히 2라면, 셀은 On/Off 여부와 상관없이 다음 라운드에서도 현 상태를 유지한다.
    • 만약 인접한 셀 중에 On으로 표기되어 있는 셀의 숫자가 정확히 3이라면, 셀은 On/Off 여부와 상관없이 다음 라운드에서 On이 된다.
    • 이 외의 모든 경우는 다음 라운드에서 Off가 된다.
  • 인생 게임은 경우에 따라서는 검은색과 흰색에 어지럽게 널려 있기도하고, 마치 세균 배양 접시에 박테리아가 자라나는 듯 복잡하지만 일정한 패턴을 보여주기도 한다.
    • 혹자는 존 콘웨이의 인생 게임에서 카우프만의 불리언 네트워크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두 경우 모두 1960년대 폰 노이만이 발전시킨 계산 시스템들로 구성된 고도로 일반화된 그룹, 즉 ‘세포 자동자’의 형태들이다.
  • 린드그렌은 죄수의 딜레마에다 콘웨이의 인생 게임 개념을 도입했다. 다만 게임이론의 일반적 규칙에 따라 On/Off를 표시하는 대신, 죄수의 딜레마의 협조/경쟁 결정에 따라 On/Off를 표시하도록 했다.
    • 각 셀은 행위자라고 볼 수 있으며, 각 행위자들은 인접한 4명의 행위자들 –동, 서, 남, 북– 과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벌이게 된다.

  • 한 행위자가 팃포탯 전략을 쓰고 다른 행위자는 반팃포탯 전략을, 또 다른 행위자는 항상 협조하는 등 다양한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 린드그렌은 각 셀을 행위자들의 전략에 따라 색칠하기로 했다. 그런 다음 각 행위자들이 인접한 4명의 행위자들과 벌인 게임의 점수를 평균한다.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행위자는 해당 라운드의 승자가 되어 인접한 패자 셀들의 중앙을 차지한다. 마치 바이러스와 같이 승리의 전략을 이웃에 전파하게 되는 것이다.
    • 만약 반팃포탯 전략을 사용한 행위자가 승리할 경우 중앙의 행위자는 반팃포탯 전략을 사용한 행위자에게 잠식당하게 되며 다음 라운드에서는 반팃포탯 전략을 사용해야만 한다.
  • 그렇다면 각 행위자들의 전략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우선 임의로 각 행위자들에게 모두 다른 전략을 부여한 다음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 그러나 그 경우 특정 균형에 도달하거나 단순히 반복되는 주기를 형성하는 등 정확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다.
    • 이는 팃포탯보다 월등한 전략을 찾고자 했던 액설로드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 했다. 임의로 선택한 전략이 우수한 전략으로 판명 날 가능성은 상당히 낮기 때문이다.
  • 린드그렌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하여금 스스로 진화를 통해 죄수의 딜레마 전략이 모두 모여 있는 디자인 공간을 탐색하고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할 수 있는 전략을 찾아내도록 했다.
    • 린드그렌은 격자 무늬 바둑판 위에 놓인 행위자들에게 전략을 1과 0으로 암호화한 컴퓨터 DNA 도식을 각각 부여했다. 린드그렌은 행위자가 과거의 자신과 상대방의 결정을 기억해 다음 라운드에서는 경험에 의한 성공적인 전략을 예측할 수 있다고 추측했다.
    • 따라서 각 행위자의 컴퓨터 DNA에 자신과 상대방의 과거 결정을 주입하게 되면, 행위자는 협조할지 변절할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 린드그렌은 행위자들에게 전 라운드만의 결과를 주입한 후 게임을 시작했다. 바로 전 라운드의 결과만을 알고 있는 행위자들은 다음과 같은 총 4가지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
    • 항상 변절한다. 항상 전 라운드에서 상대방이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지와 무관하게 변절한다.
    • 항상 협조한다. 항상 전 라운드에서 상대방이 어덯나 결정을 내렸는지와 무관하게 협조한다.
    • 팃포탯 – 항상 전 라운드에서 상대방이 내린 결정을 따라 한다.
    • 반팃포탯 – 항상 전 라운드에서 상대방이 내린 결정과 반대로 따라 한다.
  • 린드그렌은 게임을 시작할 때 임의적으로 각 행위자들에게 위의 4가지 전략을 고루 부여한 후 진화 시뮬레이션을 시행하고 주기적으로 임의적 변화를 주어 그 결과를 추적했다. 린드그렌의 모델에서는 3가지 변화를 가했다.
    • 첫째는 ‘점 돌연변이(Point Mutations)’로 행위자의 컴퓨터 DNA 일부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예컨대 01 -> 00.
    • 둘째는 ‘유전자 복제(Gene Duplication)’로 DNA 일부가 복사되어 꼬리에 첨가된다. 예컨대 01 -> 011.
    • 유전자 복제 효과 중 하나는 행위자가 과거의 결정 패턴을 더욱 많이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자는 바로 전 라운드의 결과뿐 아니라, 그 이전 라운드에 있었던 일까지도 기억해 내어 게임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 기억이 확장될 수록 행위자는 더욱 복잡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상대방이 변전할 경우 나도 변절한다. 상대방이 또 변절할 경우 나는 협력한다”
    • 셋째는 ‘분할 돌연변이(Split Mutations)’로 DNA의 어느 한쪽을 모두 삭제하는 것이다. 예컨대 011011000110001 -> 011011. 분할 돌연변이는 기억력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효과를 초래하고 전략의 복잡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
  • 한편 린드그렌은 이런 변이에 덧붙여 협조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서 벼절을 택하게 하는 등 행위자들이 가끔씩 실수를 하도록 만드릭도 했다.

바둑판 위의 우림

  •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 린드그렌은 가로 세로 각각 128칸의 게임판을 제작했다. 게임판 내에서는 총 1만 6,384개의 네모 칸이 있으며, 한 칸에 한 명의 행위자가 자리한다. 각 행위자는 앞에서 언급한 4가지 전략 중 임의로 하나를 택하여 게임을 시작한다.
    • 린드그렌이 스위치를 누르면 게임이 시작되고 진화 과정이 진행된다. 전략들이 진화하기 시작하고, 이중 가장 우수한 전략이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하면서 근접한 셀에 자리한 행위자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전파시킨다.
  • 게임이 진행되면서 생태계가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4가지 전략이 상호작용한 끝에 최초에는 아무렇게나 질서 없이 흩어져 있던 행위자들이 점차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 ‘팃포탯’과 ‘항상 협조 전략’을 택한 행위자가 함께 고득점을 차지하게 된다. 반면 ‘항상 변절 전략’을 택한 행위자는 ‘반팃포탯’을 무자비하게 이용해 먹고, ‘항상 협조 전략’의 행위자는 ‘항상 변절 전략’의 행위자에게도 예외 없이 협조한다.
    • 그러나 곧 항상 변절하는 행위자의 대다수가 게임판에서 사라진 반면, 협조하는 행위자들의 규모가 크게 늘어나 하나의 섬을 이룬 듯한 모양을 띈다. 그리고 이 섬 모양의 중심에는 항상 협조 전략을 택한 행위자들이 대거 자리하고 있으며, 계속적인 협조를 통해 높은 점수를 올린다. 팃포탯 전략가들이 항상 협조 전략가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항상 변절 전략가들은 섬의 밖으로 밀려난 것을 볼 수 있다.
    • 그러나 이러한 협조적인 섬이 항상 이 모습 그대로 지속될 수는 없다. 때때로 변절 전략을 택한 행위자들이 협조적 무리를 파고들어 인근 협조 전략가를 침몰시키는 경우도 있고, 협조 무리들의 규모가 마치 박테리아와 같이 빠른 속도로 증대되어 변절자들의 무리를 몰아내는 경우도 나타날 수 있다. 협조와 변절 간의 전략 게임이 지속되면서 네모, 지그재그, 소용돌이 등 다양한 모양의 패턴이 형성된다.
  • 시간이 지나면, 4가지 전략들의 싸움터에 혁신적인 새로운 전략이 등장할 수도 있다. 돌연변이의 등장으로 인해 행위자의 기억력이 증대되어 더 오래된 과거에 있었던 대결 경험까지도 참고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복잡한 전략 구사가 가능해진다.
    • 이러한 돌연변이 중 다수는 오래지 않아 소멸되어 버리는 무의미한 전략이지만, 일반적으로 기억력의 확대는 행위자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이며 새로운 전략이 성공했을 경우는 인근 행위자들을 통해 전파된다.
    • 그 예로 린드버그는 ‘사기꾼’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다. 이 전략에 따르면 이전 라운드에서 두 행위자가 협조와 변절 여부에 상관없이 똑같은 전략을 선택했을 경우 이번 라운드에서는 협조하는 편을 택하고, 이전 라운드에서 두 행위자의 선택이 같지 않았을 때는 변절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
    • 또 다른 하나는 이른바 ‘복수적 전략’ 이다. 첫 라운드에서는 협조하는 편을 택한다. 그런데 이때 상대가 변절하는 편을 택했을 경우 다음 라운드에서는 변절하는 편을 택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팃포탯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3라운드에서 다시 한 번 변절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을 알려준 뒤 다시 협조로 돌아선다.
    • 일부 전략들은 매우 훌륭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팃포탯 전략이 가져올 수 있는 문제는 두 팃포탯 전략가가 맞서게 될 경우 한 명이 실수로 변절하면 두 행위자는 끊임없이 서로를 변절하게 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 ‘공정’이라는 이름의 전략은 첫 라운드를 협조하는 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변절할 경우 ‘화가 난’ 행위자는 상대방이 다시 협조로 돌아설 때까지 계속해서 변절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만약 공정 전략가가 실수할 경우에는 상대방이 이를 용서해 줄 때까지 협조하게 되며, 결국 상대방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되면 다시 두 행위자는 협조를 지속하게 된다. 따라서 공정 전략을 택한 행위자들은 말 많고 실수투성이인 환경에서도 좋은 성적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숲의 제왕

  • 승자는 누구일까? 가장 우수한 전략은 어떤 전략일까? 린드그렌에 따르면 이와 같은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린드그렌의 모델처럼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시스템에서는 단 한명의 승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최적, 최고의 전략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특정 시기에 생존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승자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다른 누군가는 모두 죽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 결국 살아남으려면 행위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전략과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해야 하며,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주변의 다양한 변수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 “모두가 승자다”라는 표현이 있다. 어찌 보면 비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생존이라는 것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스튜어트 카우프만이 지적한 바와 같이 지구 상에 존재했던 많은 생물들 중 대다수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이른바 적합도 지형의 극히 작은 부분만이 특정 시점에 현실 속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 만약 당신이 ‘초우량 기업을 찾아서’와 같은 식의 연구를 해서 100가지의 가장 우수한 생존 및 증식 전략을 뽑았다고 하자.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 그 리스트를 살펴 본다고 하자.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 보일 것이다. 오늘 날 가장 성공적인 전략이 100년 후에는 가장 별볼일 없는 전략으로 돌변할 수 있으며, 반대로 100년 후에 가장 성공적인 전략으로 칭송받을 전략이 오늘날에는 그저 그런 점수를 받고 있거나 심지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전략일 수도 있다.
  •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생태계에서 어떤 한 전략이 가장 우수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 린드그렌의 모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느 한 순간 특정 전략이 등장하여 한동안 게임판을 지배하는 등 화려한 나날을 보내다가도 새롭게 등장한 다른 전략에 의해 결국 소멸되는 경우도 있고, 때때로 일부 전략들이 동시에 등장하여 게임판을 독식하다가 새로운 전략의 등장으로 게임판에서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있다.
    • 함께 등장한 두 전략이 공생 관계처럼 협조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러한 경우 한 전략에 문제가 생길 경우 나머지 한 전략도 동시에 침몰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 그런가 하면 게임판에는 바퀴벌레 같은 존재들도 있다. 팃포탯과 같은 단순 전략을 구사하면서 게임판을 독식하지는 않지만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상관없이 근근이 삶을 이어 나가는 전략 말이다.
  •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게임은 앞에서 설명했던 일느바 ‘단속 균형’이라는 불연속적 패턴으로 흘러간다. 게임이 진행되면서 승리 전략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 이들이 게임을 지배하게 되면서 상대적인 안정기가 지속될 수 있다.
    • 이러한 시기에는 모두가 공생하면서도 일부 행위자들의 전략이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구가하게 되어 아무도 전략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진화생물학자 존 스미스가 말한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volutionary Stable Strategies, ESS)이다.
    • 그러나 조만간 또 다른 작은 혁신이 일어나 발전 모멘텀을 얻게 되면 게임판의 패턴은 순식간에 뒤바뀔 수도 있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 경제가 호황일 때는 협조 위주의 전략이 우세를 보이는 등 가끔씩 모든 행위자들이 수익을 거둘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경제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면 변절과 실패의 시대가 도래한다.

예측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 이 모든 소란의 원인은 특정 환경과 시간에서 어떤 전략의 성공과 실패 여부가 다른 전략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이 게임판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제인과 크리슈나의 ‘핵심종(keystone, 키스톤) 모델’과 아주 유사한 하나의 거대 생태학적 그물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키스톤 모델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스템의 일부분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는 널리 전파되어 반대편에서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 팃포탯 전략가들에게 둘러싸인 ‘항상 협조’ 전략가들을 떠올려 보자. 팃포탯 전략가들은 ‘항상 변절’ 전략가들로부터 ‘항상 협조’ 전략가들을 보호하는 형국을 띠고 있다. 그러나 팃포탯 전략가들에게 작은 돌연변이가 발생해 이들이 일종의 축소 악순환에 빠져 드는 일이 발생한다고 가정하자. 이 틈을 타서 ‘항상 변절’ 전략가들이 섬 내부로 침입을 시도하면 ‘항상 협조’ 전략가들의 섬은 급속히 붕괴되어 게임판에서 사라지고 만다.
    • 이렇게 변화에 민감한 성향으로 인해 그 누구도 방정식을 사용하여 모델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실제 경제만큼이나 예측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 혹자는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이 모델 내의 임의적 요소들, 예컨대 임의적 돌연변이나 행위자 행태상의 임의적 오류 같은 것들 때문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컴퓨터에 프로그램된 모델은 사실상 완벽하게 결정론적이기 때문에 돌연변이율이나 오류를 임의로 작성한 후 두 차례에 걸쳐 프로그램을 돌려 보면 두 번 모두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우리는 한 모델의 행태를 조절하는 특정 모수들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돌연변이의 등장 횟수, 오류 발생 비율, 그리고 게임 내의 상대적 보상 체계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게임의 거시적 행태에 영향을 미친다. 이 모수들의 값에 따라 행위자들은 매우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높은 점수를 획득할 수도 있고, 반면 빠져나올 수 없을만큼 침체된 비협조적인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다.
  • 또한 가장 혁신적인 신전략을 발전시킬 수 있는 모수들의 값은 어떤 것인지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정확한 결과 예측은 여전히 불가능 하지만 “돌연변이의 비율이 0.001 이하면 혁신과 협조 수준은 매우 낮다” 혹은 “돌연변이의 비율이 0.001 이상 0.01 이하일 경우 게임 환경은 매우 역동적이고 혁신적으로 변화하며 협조 수준과 이익 또한 상승한다” 등과 같은 표현들이 가능해진다.
    • 마찬가지로 모수들의 값에 따라 게임 환경은 특정 전략들에 우호적 또는 적대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친절하지만 터프한(Friendly But Tough) 전략은 비록 많은 오류가 발생하지만 협조적 환경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보였던 반면, 강철주먹(Iron Fist) 전략은 매우 비협조적인 환경에서 돋보였다” 등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 또한 모수들의 값에는 아무런 변화 없이 임의로 서로 다른 외부적 충격을 가함으로써 그런 결과들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아보기 위해 모델을 수천 번 돌려 볼 수도 있다.
    • 그 결과 “모수의 조건을 X와 같이 구성했을 때 고득점 게임 환경이 나타날 확률과 저득점 게임 환경이 나타날 확률은 각각 60%와 40% 였다” 등과 같은 분석이 가능할 수 있다.
  •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델의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모수들의 값을 관찰하고 통계를 모아 모델의 행태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는 있다. 많은 경우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이 그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앞에서 우리는 칼 심스가 진화를 이용해 수영이라는 문제에 대한 좋은 해답을 발견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린드그렌의 모델에서는 경제 문제에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찾기 위해 진화적 방법이 사용되었다. 최고의 전략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개념과 같이 오히려 진화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전략이 등장한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환경 생태계와 같다.

바벨의 도서관

  • 대니얼 데닛은 그의 저서 <다윈의 위험한 생각>에서 영어로 쓰일 수 있는 500페이지 분량의 모든 책들이 소장된 초대형 도서관을 상상해 보도록 제안한다. 그는 이 상상의 도서관을 가리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을 따라 ‘바벨의 도서관(the Library of Babel)’이라고 불렀다.
    • 바벨의 도서관에는 1001,000,000에 해당하는 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멘델의 도서관’이나 ‘레고의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우주보다 더 크고 방대한 크기로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다.
  • 바벨의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 빈칸으로만 가득한 책들, ‘a’라는 문자만 가득한 책들, 온통 검은색으로 색칠된 책들 등 여러 가지 책들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는 책들의 거의 대부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들의 조합만이 담겨 있을 것이다. 데닛이 지적한 바와 같이 단 한 문장이라도 문법적으로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을 포함한 책을 발견할 확률은 극히 낮다.
    • 그러나 바벨의 도서관에는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들 뿐만 아니라 <모비 딕(Moby Dick)>에 대한 완벽한 제본도 들어가 있다. 또한 <모비 딕>과 모든 면에서 똑같아 보이지만 <보비 딕(Boby Dick)>이라는 고래가 등장하는 책도 있고 <코비 딕(Coby Dick)>, <도비 딕(Doby Dick)>도 있다.
    • 더욱 놀랄 일은 바벨의 도서관 어딘가에는 여러분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그리고 여러분의 죽음에 관한 내용까지 정확히 담긴 500쪽짜리 당신의 자서전도 있다는 것이다.
    • 만약 500페이지가 못 되는 책이라면, 예컨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처럼 192페이지에 불과한 책의 경우 바벨의 도서관에는 192페이지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가 담겨 있지만, 나머지 308페이지에는 아무 내용도 없는 그런 책이 된다. 반대로 500페이지가 넘어 933페이지에 달하는 <율리시스>와 같은 책은 2권 세트로 구성된다.
    • 여러분은 특정 레고 세트를 사용하여 만들 수 있는 레고 디자인은 한정되어 있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있을것이지만 향후 쓰일 책들의 수가 한정되어 있다는 의견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디자인 공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작품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디자인 공간이 확대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는데, 이 역시 틀렸다고만 볼 수 없다.
    • 디자인 공간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에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다. 디자인 공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계가 없으며 마치 풍선처럼 그 크기가 확대될 수 있다. 바벨의 도서관에 놓여 있는 책의 수를 유한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데닛처럼 각 권의 페이지를 500페이지로 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임의적인 한계일 뿐, 이론적으로 책의 길이(페이지 수)에는 정해진 한계가 없다. 그러나 특정 시점에서 보면 가장 긴 책은 있기 마련이고 이것이 그 순간에는 상한선이 된다.
    • 물리학적 법칙은 도식 식별자가 끝도 없이 긴 코드를 해독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제 세계에서 물리적으로 만들어지는 디자인은 유한한 도식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 유한한 도식은 곧 디자인 공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디자인 공간에는 한계가 있지만 가장 길게 만들어질 수 있는 도식의 가장자리 둘레가 늘어나거나 축소될 수 있으므로 디자인 공간은 시간에 따라 확대되거나 축소될 수 있다.
    •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구 상에서 DNA를 가지고 있는 생물체의 디자인 공간은 확대돼 왔다. DNA는 시간이 흐를수록 길어지고 해당 종족이 ‘테크놀로지(기술, 예컨대 난자, 자궁 등)’를 통해 길어지는 디자인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마찬가지로 문헌 상의 디자인 공간의 크기 역시 시간에 따라 변한ㄴ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석판에 상형 문자를 새겨 넣던 시기의 책은 당연히 짧았을 것이다. 그리고 향후 초고속으로 책의 내용을 바로 우리의 뇌로 전송할 수 있는 기술이 발견된다면 프루스트의 작품도 간결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 바벨의 도서관은 디자인 공간에 관해 또 하나의 중요한 저미을 상기 시켜 준다. 알파벳, 숫자, 그림 혹은 DNA의 화학적 코드 등 일련의 기호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디자인 공간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디지털화되어 컴퓨터에 저장될 수 있다면 그것은 디자인 공간의 자격 조건을 갖춘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유한 하지만 무한한 음악, 예술, 요리법, 빌딩 디자인 등의 도서관들을 상상할 수 있다.
  • 이제 한 사업가가 실수로 공항 검색대에 놓고 간 노트북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상상해 보자. 우리는 이 컴퓨터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MP3 음악 파일, 가족사진, 프레젠테이션 문서 자료, 가계부, 이메일 심지어 사업 계획서 등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스미스의 박물관

  • 복잡한 대규모 기업들조차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단일의 사업 계획서를 가진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의 경우 사업 계획서의 내용들이 조직 전반에 걸쳐 산재해 있을 것이다. 반면 소규모 기업의 경우 형식적인 사업 계획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머릿 속에 있는 계획이 전부인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만약 현재 문서로 된 사업 계획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 이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작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 데닛의 바벨 도서관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보자. 한 권당 500페이지에 달하는 혹은 여러 권으로 구성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사업 계획서들로 가득한 방대한 도서관을 상상해 보자. 도서관의 각 선반에는 우주를 가로지를 만큼의 방대한 양의 사업 계획서로 가득차 있다. 사실상 가능한 모든 사업 계획서가 있는 이 도서관은 바벨 도서관의 일부 특별 구역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바벨 도서관의 제 2 도서관인 이곳을 애덤 스미스의 이름을 붙여 ‘스미스의 도서관(the Library of Smith)’라고 부르기로 하자
  • 스미스의 도서관 서가에서 우리는 타임스퀘어에서의 1인 구두닦이 사업 계획서에서부터 IBM의 전략을 정확히 기술하고 있는 사업 계획서, 아직 발명되지도 않은 슈퍼나노 신경 포배관을 제조하고 판매한느 기업의 사업 계획서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물론 다른 디자인 공간처럼 스미스 도서관에 있는 방대한 사업 계획서들 중 대다수는 문법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문장으로만 가득할 것이며 실현 가능한 계획이 담긴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 이 상상의 사업 계획서는 어느 정도 세밀하고 구체적이어야 할까? 어떻게 <모비 딕>과 사업 계획서를 구분할 수 있을까?
    • 다른 도식을 사용하여 이 실험을 반복해 보기로 한다. 스미스 도서관의 사업 계획서가 사용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테스트는 사업 계획서 식별자가 있어서 그 계획을 활용해 경제적 활동을 조직화하고 창출해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업 계획서 식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기업의 경영 팀이다.
  • 현재가 2006년이라고 상상하고 스미스 도서관에서 ‘시스코 시스템스의 2007년 사업 계획서’라고 적힌 문서를 꺼내 현재의 시스코 경영 팀에 전달한다. 만일 시스코 경영팀이 이 책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고 이를 행동에 옮길 수 있다면 이는 유효한 사업 계획서가 된다. 만일 해당 사업 계획서에 허무맹랑한 내용만 담겨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만일 시스코 경영팀에 전달한 책이 <모비 딕>이었다면 경영자들은 <모비 딕>을 재미있게 읽겠지만 시스코의 사업 내용에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 어떤 상상의 사업 계획서도 그것이 비록 수천 페이지가 넘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세세한 측면에서 시스코를 발전시킬 수 있을만큼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 그러나 도식을 디자인으로 바꾸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도식이란 결국 이들이 묘사하고자 하는 디자인을 간단히, 압축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내용들이 세세하게 계획서에 기술될 필요는 없다.
    • 사업 계획서는 식별자가 이미 알고 있는 묵시적인 지식, 문장, 기술 등에 크게 의존한다. 마치 레고의 도식에서 어린아이들이 플라스틱 벽돌들을 선택하여 쌓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DNA 도식에서 정말 필요한 능력을 갖춘 난자와 자궁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 따라서 사용 가능한 사업 계획서란 2006년 시스코 경영 팀이 이 계획서를 가지고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만 지니고 있으면 충분하다.
  • 생물학적 시스템에서처럼 사업 계획서의 도식과 식별자들은 함께 진화한다. 예컨대 시스코의 2005년 사업 계획서는 2006년에 어떤 종류의 경영 팀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고, 그 구성원들이 어떤 기술을 획득해야 하는지, 어떤 종류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지 그런 조건 하에 어떤 종류의 경험을 해야 할지에 이미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다시 그 팀이 식별해 내어 2007년에 수행하고 하는 사업 계획서의 형태를 정의하고, 그 2007년 사업 계획서는 다시 관리 팀의 미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식의 ‘공진화’ 과정으로 나가는 것이다.

경제의 진화 모델

  • 야노마모 족, IBM, 2023년도의 슈퍼나노 신경 포배관 회사 등에 이르기까지 진화를 통해 스미스 도서관에서 적합한 디자인을 탐색하면서 경제는 발전해 왔다. 마치 모든 죄수의 딜레마 전략들이 자리하고 있는 도서관에서 진화적 알고리즘을 통해 혁신, 성장, 창조적 파괴라는 과정이 발생하는 것처럼 스미스 도서관을 통한 진화 역시 실물 경제에 혁신, 성장, 창조적 파괴라는 동일한 패턴을 가져다준다.
  • 앞서 언급했던 보편적 진화 모델로 돌아가보자. 사업 계획서라는 ‘기질’에서 변이, 선택, 그리고 복제의 과정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 우리는 앞으로 4장에 걸쳐 경제 상황에 적합한 디자인을 찾기 위한 진화 과정을 조사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계속 실험하고, 도전하고, 새로운 사업 전략, 조직 디자인을 창안하면서 이른바 변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선택은 경제의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일부 사업을 망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공적인 디자인에 더욱 많은 자원이 주어지고 이것이 널리 퍼지면서 경제 시스템에서 복제가 일어난다.
  • 경제의 진화는 하나의 단일 디자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3개의 디자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공진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앞 장에서 리처드 넬슨이 말했던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물리적 기술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기술’이고 사회적 기술은 인간들이 스스로 조직화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디자인, 과정 혹은 규율 등을 말한다.
    • 사업 계획서는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을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혼합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며 경제 상황에 적합한 디자인을 제시한다. 사업 계획서, 물리적 기술, 사회적 기술은 각각 독특한 적합도 함수를 가지고 있는 만큼, 3개의 디자인 공간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 사업 계획서는 경제적 목적에 맞게 선택되는 경향이 있지만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의 경우 다른 목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 많은 중요한 물리적 기술들이 군사적, 보건 혹은 기타 사회적 필요에 의해 개발되었거나 단순히 과학자나 발명가들의 호기심에 의해 개발되었다. 사회적 기술의 많은 부분도 중요한 경제적 기능을 갖고 있지만 당초에는 다른 목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진화 시스템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원래 한 가지 목적으로 진화된 혁신이 향후 다른 목적으로 활용되는, 이른바 전용 될 수 있다는 점이다.
  • 내가 이 책을 통해 강조하려는 모델은 경제의 진화를 물리적 기술 공간, 사회적 기술 공간, 사업 계획 공간이라는 세 공간에서의 합동적인 진화의 산물로 본다. 세 공간은 별개의 개념이면서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함께 진화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각 공간 마다 진화가 작동한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디자인을 탐구하고 거기에서 적합 디자인을 찾아내 증폭시키는 한 편,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디자인은 도태시킨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기술, 사회, 경제 세계의 질서는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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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uthor

지성을 추구하는 디자이너/ suyeongpark@aby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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