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자본/ 자본의 변신

부의 속성: 문학에서 현실까지

  • 오노레 드 발자크와 제인 오스틴이 소설을 쓰던 19세기 초의 부의 속성은 명백했다. 당시 재산은 지대, 즉 자산 소유주의 확실하고 정기적인 소득을 얻기 우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보통 토지나 국채 형태를 띠었다.
    • (문학 작품 속 주인공들의 자산에 대한 설명 생략)
  • 18세기 이후 자본의 구조에는 어떤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났을까?
    • 고리오 영감의 파스타는 스티브 잡스의 태블릿으로 바뀌고, 1800년의 서인도제도 투자는 2010년 중국이나 남아프리카에 대한 투자로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과연 자본의 심층적인 구조가 실질적으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을까?
    • 자본은 결코 조용한 법이 없다. 자본은 적어도 형성기에는 언제나 위험추구적이고 기업가적이다. 그러나 충분히 축적되면 자본은 늘 지대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자본의 사명이자 논리적 귀결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자본의 변신

  • 18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 구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 아래 도표에서 이 두 국가의 자본/소득 비율이 비슷한 궤적을 따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18-19세기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머물다가 20세기에 엄청난 충격을 경험한 후 다시 1차대전 직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 18-19세기를 거쳐 1914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총자본의 가치는 한 해 국민소득의 6-7배 사이를 오르내렸다.
    • 1차대전 이후 자본/소득 비율은 갑자기 추락했고, 대공황과 2차대전 때 계속해서 떨어지다가 1950년대에는 국민총자본이 국민소득의 2-3배로까지 추락했다.
    • 이후 자본/소득 비율은 상승하기 시작해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 2010년에는 두 국가 모두 자본의 총가치가 국민소득의 대략 5-6배이다.

  • 간단히 말해 자본/소득 비율은 우리가 막 지나온 세기에 걸쳐 인상적인 U자 곡선을 그리고 있다.
    • 자본/소득 비율은 1914-1945년 거의 2/3나 떨어졌다가 1945-2012년 다시 2배이상 상승했다.
    • 이는 20세기를 특징적는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갈등에 따른 엄청난 변동이다. 이런 갈등에서 핵심적인 이슈는 자본, 사유재산, 부의 세계적 분배였다. 18세기와 19세기는 이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평온해 보인다.
  • 2010년이 되자 자본/소득 비율은 1차대전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자본총량을 국민소득이 아닌 가계가처분소득으로 나눌 경우 심지어 1차대전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
  • 자본/소득 비율의 전체적인 변화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전체적인 변화가 1700년 이후 자본 구성 요소들에 나타난 엄청난 변화를 가리도록 해서는 안된다.
    • 자산 구성 면에서 21세기 자본은 18세기 자본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
    • 간단히 말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농경지는 점차 건물, 기업과 정부 기관이 투자한 사업자본 및 금융자본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연간 국민소득 대비 자본총량의 규모는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 한 국가의 총 자본은 다음과 같이 분해할 수 있다.
    • 국민총자본 = 농경지 + 주택 + 기타 국내자본 + 순해외자본
  • 장기간에 걸친 구조적 변화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반영한다.
    • 그중 하나는 경제와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주택이 갈수록 규모뿐만 아니라 질과 가치 면에서도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 다른 하나는 산업혁명 이후 기업과 정부 기관이 비농업 분야의 온갖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업용 건물, 설비, 기계, 창고, 사무실, 장비 그리고 물질적, 비물질적 자본이 대규모로 축적되었다는 사실이다.
    • 자본의 성격은 변했다. 과거에 주로 토지였던 자본은 이제 부동산, 산업 및 금융자산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전혀 잃지 않았다.

해외자본의 부침

  • 해외자산은 1750-1800년에 처음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외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
    • 영국 국민이 전 세계에 상당한 자산을 축적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동안이었는데, 그 자산 규모는 일찍이 유례가 없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기록이 깨지지 않을 정도이다.
    • 1차대전 직전까지 영국은 세계 최고의 식민제국을 건설했으며, 국민소득의 2배에 가까운 해외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 세계 두 번째의 주요 식민제국이었던 프랑스도 1년 치 국민소득보다 더 많은 해외자산을 보유한 덕분에 1900-1910년의 모든 해에 국민소득이 국내생산보다 약 5-6% 높았다.
  •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대규모 순해외자산 덕분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영국과 프랑스가 구조적인 무역적자를 기록해도 괜찮았다는 사실이다.
    • 1880-1914년 이 두 나라는 해외로 수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다른 나라에서 수입했고, 이 기간 내내 두 나라의 무역적자는 평균적으로 국민소득의 1-2%에 이르렀다.
    •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해외자산으로부터 얻는 소득이 국민소득의 5%를 웃돌았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 18세기와 현재의 국민총자본의 구조를 비교해보면, 두 시기 모두 순해외자산의 역할을 미미했으며, 장기간에 걸친 구조적 변화 속에서 국민소득과 비교한 자본총량은 대체로 변하지 않았지만 농지가 장기간에 걸쳐 부동산과 영업자본(working capital)으로 점차 대체되는 실질적인 구조 변화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소득과 부: 대략의 규모

  • (현재와 300년전 영국, 프랑스 국민소득 비교 내용 생략)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부

  • 국민총자본을 공공부문 자산과 민간부문 자산으로 구분하는 문제를 살펴보면 유용할 것이다.
    • 국민총자본은 공공자본과 민간자본의 합이다. 공공자본은 국가의 자산에서 부채를 뺀 값이고 민간자본은 물론 개인들의 자산에서 부채를 뺀 것이다.
    • 공공이든 민간이든 자본은 언제나 순 부, 즉 누군가가 소유한 것의 시장가치(자산)에서 그가 빚진 것의 가치(부채 또는 채무)를 뺀 값으로 정의된다.
  • 추정치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영국에서 공공부문 자산의 총가치가 한 해 국민소득과 거의 맞먹고 프랑스에서는 국민소득의 1.5배에 약간 못 미치는 것으로 추산된다.
    • 두 나라는 공공부문 순자산이 아주 적고 민간부문 총자산에 비하면 확실히 미미하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 공공부문의 부

  • 18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공공부문 자산과 부채는 민간부문에 비해 매우 미미한 금액이었다.
    • 다시 말해 18세기 이래 국민소득 대비 국민총자본 비율의 역사는 대체로 국민소득과 민간자본 간 관계의 역사였다.
    •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사유재산에 기반을 둔 국가로서 국가가 대부분의 자본을 통제하는 공산주의를 실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놀랍지 않은 일이다.

  • 이 두 나라에서 공공정책이 극단으로 치달은 적은 없지만, 정책이 민간부문 부의 축적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 적이 분명히 몇 차례 있었으며 정책 방향에도 차이가 있었다.
    • 18세기와 19세기 영국에서는 정부가 대규모 공공부채를 짐으로써 민간의 부를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앙시앵레짐과 벨 에포크 시대 프랑스 정부도 똑같은 일을 했다.

영국: 공공부채와 민간자본의 강화

  •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와 2차대전 후 영국의 공공부채는 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는데, GDP의 200% 혹은 그보다 약간 더 높은 수준이었다.
    • 영국은 그 어떤 국가보다 높은 수준의 공공부채를 가장 오랜기간 떠안고 있었지만 한 번도 디폴트에 빠지지 않았다.
    • 사실 영국이 디폴트 상태가 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많은 공공부채를 오랫동안 지고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 (영국과 프랑스의 부채 이야기 생략)
  • 이런 역사적 경험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 먼저 영국의 높은 공공부채가 영국 사회에서 민간부문 부의 영향력을 확대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재산을 가진 영국인들은 민간투자를 눈에 띄게 줄이지는 않으면서 정부에 필요한 돈을 빌려주었다. 1770-1810년 크게 늘어난 공공부채는 주로 그에 상응하는 민간저축으로 충당되었다.
    • 이는 당시 영국의 유산계급이 정말로 번창하고 있었고 국채 수익률이 매력적이었음을 보여준다.
    • 이에 따라 이 기간 내내 국민총자본은 국민소득의 대략 7배 수준에서 안정된 상태로 머물러 있었고 민간의 부는 1810년대에 국민소득의 8배가 넘게 늘어났다. 이때 공공부문의 순자본은 점점 더 큰 폭으로 마이너스가 되었다.
    • 둘째, 모든 면을 고려했을 때 이토록 높은 수준의 공공부채가 채권자들과 그 자손들의 이해관계에 아주 잘 맞아떨어졌음은 분명하다. 정부에 돈을 빌려줄 여유가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봤을 때 보상도 없는 세금을 내는 것보다 정부에 돈을 빌려주고 수십 년간 그 이자를 받는 편이 훨씬 더 유리했다.
    • 더욱이 정부 적자는 민간 자본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를 증대시켜 불가피하게 그 자본에 따른 수익율을 높여주었으며, 이는 국채 투자수익률에 따라 소득 수준이 달라지는 사람들의 이해에도 부합했다.
  •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자 20세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19세기에는 정부에 돈을 빌려준 사람들의 보상이 상당히 컸다는 것이다.
    • 1815-1914년 인플레이션은 사실상 제로였고 국채 이자율은 보통 4-5% 수준이었다. 이는 당시 성장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공공부채에 투자하는 것은 부자들과 그 상속인들에게 수지맞는 장사가 될 수 있었다.
    • 1815-1914년에 걸쳐 영국의 예산은 항상 상당한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조세 수입이 늘 지출을 초과해 흑자 폭은 GDP의 몇%에 이르렀다.
    • 결국 영국이 한 세기의 고행 끝에 국민소득 대비 공공부채 비율을 크게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국내생산과 국민소득이 1815-1914년까지 한 해에 2.5%가까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공공부채는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가?

  • 공공부채에 관한 기록은 몇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 첫째 마르크스를 비록한 19세기 사회주의자들에게 어떤 통찰력을 발휘해 공공부채를 민간자본의 도구로 보면서 왜 그토록 경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 당시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도 공공부채 투자자들은 두둑한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의 염려는 더욱 컸다.
    • 20세기에는 공공부채에 대한 다른 견해가 부상했다. 이런 견해는 부채가 공공지출을 늘리고 가장 가난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득이 되도록 부를 재분배하는 정책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 이 두가지 견해의 차이는 매우 단순하다. 19세기에는 채권자가 부채에 대한 두둑한 이자를 받아 사적인 부를 늘릴 수 있었던 반면, 20세기에는 부채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가치가 하락했고 가치가 줄어든 화폐로 지불되었다.
    • 이런 상황은 실제로 그만한 세금 인상 없이 국가에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재정적자를 메우도록 해주었다.
    • 공공부채에 대한 이런 ‘진보적’인 관점은 인플레이션이 오래전부터 19세기보다 그리 높지 않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재분배 효과가 비교적 불분명한데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인플레이션 덕분에 프랑스와 영국 정부의 부채가 줄어든 내용 생략)
  • 인플레이션을 통한 재분배 메커니즘은 매우 강력했고, 20세기를 처기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인플레이션 메커니즘은 목표를 선택하는데 그다지 정밀하지 않다. 어느 정도 재산을 보유한 사람들 가운데 국채를 가진 이들이 반드시 부유한 사람은 아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 (국채는 대부분 은행이 가지고 있지 않나?)
    • 둘째, 인플레이션 메커니즘은 무기한 작동할 수 없다.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 채권자들은 좀 더 높은 명목 이자율을 요구하고 따라서 물가 상승이 기대만큼 효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리카도 등가의 부침

  • 길고 격동적인 공공부채의 역사는 그 시대의 집단적인 기억과 논의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 이같은 역사적 경험은 경제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흔적은 남겼는데, 예컨대 1817년 리카도가 오늘늘 ‘리카도의 등가(Ricardian equivalence)’ 즉, 특정한 조건에서는 공공부채가 국민총자본 축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내용의 가설을 공식화 했을 때, 이미 그는 주위에서 목격한 현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 그가 책을 쓸 당시에도 영국의 공공부채는 GDP의 200%에 가까웠으나 이런 공공부채가 민간투자나 자본 축적의 흐름을 고갈 시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크게 염려했던 ‘구축 효과(crowding out effect)’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 민간 투자가 위축되는 효과– 는 일어나지 않았고, 늘어난 공공부채는 민간저축 증대로 충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물론 이것이 리카도 등가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왜냐면 모든 것은 관련 사회집단의 번영, 제시된 이자율, 정부에 대한 신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리카도는 역사적인 시계열 자료나 자본 유형의 통계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당시 영국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지식을 지녔었다.
    • 리카도가 영국의 거대한 공공부채는 국부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단순히 그 나라 국민의 일부가 다른 사람들에게 갖는 청구권을 구성할 뿐이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 마찬가지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자본소득자의 안락사’에 대해 저술할 당시 그 역시 주위에서 관찰되는 일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 그 무렵 1차대전 이전의 자본소득자들은 몰락하는 중이었고, 당시의 경제적 위기나 예산상의 어려움을 극복할 만한 어떠한 정치적 해결책도 마련되지 않았다.
    • 특히 케인스는 인플레이션이 공공부채의 짐을 덜고 축적된 부의 영향을 줄이는데 반드시 가장 공정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가장 단순한 방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 당시 영국인들은 1914년 이전 금본위제에 대해 강력한 믿음을 갖는 보수적 태도 때문에 여전히 인플레이션을 받아들이기 꺼렸다.
  • 1970년대 이후 공공부채에 대한 분석은 이른바 대표적 경제주체 모형에 경제학자들이 아마도 지나치게 의존했었다는 사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 이 모형에서는 각 경제 주체가 같은 소득을 얻고 같은 금액의 재산을 물려 받는다.
    • 이처럼 현실을 단순화 시키면 좀더 복잡한 모형에서는 분석하기 어려운 논리적 관계를 끌어내는데 유용할 수 있으나, 이런 모형들은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함으로써 종종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결론에 이르며, 따라서 명확성보다는 혼란을 낳는다.
  • 공공부채 문제에 대해 대표적 경제주체 모형을 사용할 경우 정부의 빚이 국민총자본 뿐만 아니라 재정적 부담의 배분에 있어서도 완전히 중립적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 리카도 등가에 관한 이처럼 극단적인 재해석은 미국 경제학자 배로(Robert Barro)가 처음 제시한 것이다.
    • 이런 해석은 실제로는 전체 국민 가운데 소수가 공공부채의 대부분을 소유하며, 따라서 그 부채는 상환되지 않을 때는 물론이고 제대로 상환될 때에도 내부적으로 중요한 재분배의 수단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다.
  • 항상 부의 분배의 특징이었던 부의 심각한 집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회 집단 사이의 불평등을 살펴보지 않고 이런 문제들을 연구하는 것은 사실상 그 주제의 중요한 측면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 쟁점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프랑스: 전후 시대의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 정부부채의 역사와 비교할 때 공공자산의 역사는 덜 격동적이었던 것 같다.
    • 간단히 말해 프랑스와 영국의 공공자산의 총가치는 장기간에 걸쳐 늘어나 18세기와 19세기 국민소득의 약 50%에서 20세기 말에는 대략 100%로 증가했다.
  • 대체로 이같은 공공자산의 증가는 역사적으로 정부의 경제적 역할이 꾸준히 확대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 이는 특히 갈수록 늘어나는 공공서비스의 발전에 따른 것이며 여기에는 의료와 교육 분야 서비스 및 운송과 통신 분야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공공 또는 준공공투자가 포함된다.
  • 장기간에 걸친 공공자산 축적에 대한 이 단순하고 차분한 분석은 지난 세기의 역사에서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고 있다.
    • 1950-1980년에 산업과 금융부문에서 상당한 규모의 공공자산 축적이 이뤄진 다음, 1980년 이후 나타난 그 자산들에 대한 대대적인 민영화 물결이 그것이다.
    • 이 두 현상 모두 여러 신흥국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진국, 특히 유럽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1930년대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파급효과로 민간 주도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이 크게 흔들렸다.
    • 모든 나라가 19세기 그리고 대체로 1930년대 초까지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방임주의’를 고수했는데, 이 전통적인 교리는 영구적으로 신뢰를 잃었다. 많은 나라가 더 높은 수준의 국가 개입주의를 선택했다.
    • 게다가 소련이 2차대전 승리국이 된 사실은 볼셰비키가 확립한 국가주의 경제 시스템의 위상을 강화했다.
    • 1942년 슘폐터(Joseph Schumpeter)는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승리할 것이라 믿었고, 1970년 새뮤얼슨(Paul Samuelson)은 그의 유명한 경제학 교과서 8판에서 여전히 소련의 GDP가 1990-2000년 어느 시점에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 이용 가능한 통계에 따르면, 1950년 프랑스 공공자산의 총가치는 국민 소득을 초과했다.
    • 인플레이션으로 공공부채의 가치가 급격히 감소함으로써 공공부문의 순자산은 국민소득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고, 당시에 민간의 자산 총액은 국민소득의 겨우 2배였다.
  • 국유화의 물결은 1950년에 공공자산의 가치가 국민소득을 능가한 영국을 비롯해 같은 시기에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나타났다.
  • 1980년대 전 세계 국가들에 영향을 미친 경제의 민영화는 상품과 서비스 시장의 자유화, 금융시장과 자본 흐름에 대한 규제완화를 포함하는데, 그 기원은 복잡하고 다양했다.
    •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은 전후 시대 케인스식 정책의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전후의 재건과 영광의 30년 동안 높은 성장률을 구가하던 시기가 끝나면서 정부의 역할 그리고 국가 전체 생산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한정 확장되는데 의문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규제완화 움직임은 1970-1980년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보수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당시 두 나라는 다른 나라들에게 추월당할까봐 신경을 쓰고 있었다.
    • 한편 1970년대 소련과 중국의 국가주의 모델의 실패가 점점 더 분명해지자, 공산권의 두 거인은 1980년대에 기업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사유재산을 도입해 경제 시스템의 점진적인 자유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 (이하 프랑스 상황 설명 생략)
[ss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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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을 추구하는 사람/ suyeongpark@aby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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