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긴 생각

삶을 이루는 3가지 원칙

40년 가까이 살면서 깨우친 삶을 이루는 3가지 원칙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있겠지만 내 나이가 내 삶의 절반 정도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보면 적어도 이 3가지 원칙이 삶의 절반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1.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붓다
  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예수
  3. 공짜를 바라지 마라

제 1 원칙

붓다가 유언으로 남겼다는 저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기준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많은 영역이 운에 닿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밖의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다른 것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오로지 스스로의 기준으로 삶을 살아 가야 한다.

삶이란 생각 보다 길기 때문에, 1-2년의 세상 돌아가는 것이나 남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기준으로 10-20년을 바라보고 정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남들은 따라 오기 어려운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제 2 원칙

황금률이라고도 하는 이 원칙은 나 자신에 대한 제 1 원칙과 달리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호혜성이나 상호성의 원칙과도 맥락이 통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친절하고 잘해주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하지, 자신에게 까다로운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이는 까다로운 사람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은 결국 타인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 좋고 장기적으로 같이 발전하는 관계 구축이 가능하다.

물론 세상에는 무임승차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불이익이 발생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절대 다수는 아니고 세상에는 평판이라는게 존재해서 무임승차자가 영구적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그런 사람은 네트워크 내에서 평판이 떨어져서 결국 네트워크 내에서 배제 당하게 된다.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는 없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 협력을 이끌어 내려면 결국 타인에게 호혜적이어야 한다.

제 3 원칙

공짜라는 표현 때문에 이 원칙을 경제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면 다소 협소한 이해이다. 이를 에너지라는 개념으로 확장해 보면 이것은 엔트로피에 대한 것이며, 이는 과학계에서 절대 위상을 차지하는 열역학 제 2법칙과 맞닿은 것이다.

세상 일이란 결국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르며, 질서를 잡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투여해야 한다. 에너지를 쓰지 않고는 질서를 잡을 수가 없다.

공부하지 않고 성적이 좋을 수 없고, 운동하지 않고 좋은 몸을 가질 수는 없다. 극도로 운이 좋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는 에너지를 쓰지 않고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 인생을 운에 맞길 수는 없지 않은가?

노력 없이 좋은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해야 한다.

관찰자와 행위자

내가 미로 속에서 길을 찾고 있고, 그런 나를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가 있다고 하자.

그 관찰자 입장에서는 미로 전체와 그 안에서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한 눈에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가면 어떠한 결과가 벌어질 지 예측이 가능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자체는 예측할 수 없는데 내가 직진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존재하는 위치에 따라 예측이 가능한 것과 그 범위 자체가 달라진다는 특성이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금 글의 주제와 다르므로 차후에 정리해 보겠다. —-이 경우에서 행위자는 자신의 행동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자신의 방향을 유지할 경우 발생할 미래 –미로가 이어지는 길– 은 예측 불가, 관찰자는 행위자가 자신의 방향을 유지할 경우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예측 가능하지만, 행위자가 현재 어떤 행동을 결정할 지는 예측 불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내가 현재 진행하는 외길의 끝이 오른쪽으로 이어져 있고 그 길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가정하자. 관찰자 입장에서 행위자인 내가 현재 방향을 고수할 경우 저 행위자는 곧 죽겠군 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조치를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행위자인 내 입장에서 내가 이 미로 속에서 죽음의 경로를 찾는 것 –자살을 하려는 것– 이 목적이 아닌 이상 길을 따라 가다 끝에서 돌았더니 낭떠러지가 나왔다면 ‘어이쿠 여기는 길이 더 없군’ 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그만이다. 우리는 생(life)에 대한 의지와 더 나아지려는 의지를 갖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간혹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도 있겠으나 거의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든 조직의 운명이 어려워지든 우리는 관찰자 입장에서 쉽게 ‘저러다 망하지’ 라는 말을 쉽게 내놓고 나라나 조직이 망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편으로 베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행위자인 나라와 조직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생을 지속하고 더 낫게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현재의 좋지 않은 상황을 더 낫게 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것이다. –물론 나아지려고 한 결정이 스스로를 망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 조직 (혹은 개인)이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 조직 (혹은 개인)이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는 지에 대한 판단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예측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망할 것이라고 기우제 지내지 말 것이고, 근거 없이 잘 될 것이라는 믿음도 경계 해야 한다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나 압도적인 힘을 가진 경쟁자에 의한– 것이 아닌 이상, 어찌되었든 역량이 존재한다면 어려움이라는 것은 결국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수평적, 수직적 공동체의 갈등

<개인의 가치와 공리주의>에서 이어지는 글

상황 1

앞선 글에서와 같이 자신이 해안구조대라는 상황이고 두 명의 사람이 해변의 양 끝에 빠져서 구조를 요청하는 동일한 상황이라고 하자. 이때 한 쪽에는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이 빠져있고, 다른 한 쪽에는 모르는 사람이 빠져 있다고 할 때, 자신의 가족을 구할 가능성이 50:50 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며,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가족을 우선시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수평적 공동체의 갈등 상황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후의 상황에 더해 좀 더 설명해 보겠다.

상황 2

똑같은 상황인데, 이번에도 한 쪽에는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이 빠져있는데, 다른 한편에는 국가적 영웅이고 현재 국가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빠져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죽으면 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는 반면, 그 사람이 살면 내 나라는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하자.

이런 상황이라면 그래도 내 가족을 구하겠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라의 운명을 위해 –이른바 대의–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을 옳고 그르다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수직적 공동체의 갈등 상황이라고 표현한다.

결론

상황 2는 상황 1과 무엇이 다를까? 그것은 바로 상황 1에서는 갈등의 상황이 수평적이라는데 있고, 상황 2는 갈등의 상황이 수직적이라는데 있다. –물론 수평적, 수직적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가족과 타인의 가족은 동등한 가족으로서 수평적인 관계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속한 공동체를 우선시 하는게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어 있으며, 예컨대 전쟁과 같은 선악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거의 내가 속한 나라의 편을 들도록 –물론 민간인 학살과 같은 정도가 넘어선 행위에 대해 적국의 편을 들 수도 있겠지만– 학습되어 왔다.

한편 내 가족과 내 나라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이다. 내 가족은 내 나라에 속해 있으며, 내 나라는 보다 높은 층위에서 인류라는 공동체와 수직적인 관계를 갖는다. –더 높이 올라가면 인류는 생명이라는 공동체와 수직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렇게 수직적인 관계에서는 내 가족을 우선시 할 수도 있고, 좀 더 대의에 속하는 내 나라를 우선시 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이 일본에 의해 점령 당했을 때, 내 가족을 위해 일본에 협력한 사람도 있고, 내 나라를 위해 내 가족을 희생하며 일본과 맞서 싸운 사람들도 있다.

위와 같은 갈등 상황에서 좀 더 작은 규모의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아무래도 외부의 다른 공동체와의 갈등 상황 속에서 공동체 내부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 어려워 경쟁에서 지게 되므로, 일반적으로 더 큰 공동체를 우선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문화가 어느 나라를 가든 존재한다. 이른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영웅으로 추모하고 그런 사람들을 기리며, 따르도록 하는 이른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는 교육이 그러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수직적 갈등 상황에서 어느 쪽을 우선시 하는지는 개인의 선택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는 공동체 자체의 존립이 위태롭기 때문에 공동체 자체가 도태되어 버리는 것이 이른바 사회의 질서이다.

개인의 가치와 공리주의

상황 1

자신이 해안 구조대라고 하고, 지금 해변의 좌우 끝에 두 사람이 빠져서 구조를 요청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하자.

한 쪽에 빠진 사람은 현시대의 성자로서 매년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1,000명씩 구제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리고 반대 편에 빠진 사람은 현시대의 살인마로써 매년 무고한 사람들을 50명씩 죽이는 사람이라고 하자.

두 사람이 빠진 위치가 너무 멀어서 당신은 단 한 곳의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어느 쪽으로 달려갈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50:50의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 생각 한다.

상황 2

상황 1과 같은 상황인데, 한 쪽에는 여전히 현 시대의 성자가 빠져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살인마 12명이 빠져 있다고 하자. 당신은 이 상황에서 어느 쪽을 구하기 위해 달려갈 것인가?

지독한 수준의 공리주의자가 아닌 이상 단순히 사람의 수가 12:1이기 때문에 살인마 12명을 구하러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인마는 구하는 만큼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성자는 구하는 만큼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결론

중요한 건 사람의 수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가치이다. 극단적인 예시를 위해 살인마와 성자를 들었지만, 위 논리를 납득한다면 사람의 가치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받아 들이기 어려운 사람도 있겠지만 현실에서 사람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물론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누가 성자고 누가 살인마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50:50의 확률로 살인마를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살인마를 구했다고 비난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가치라는 것은 인간 사회의 대부분의 의미가 그러하듯 맥락에 따라 다를 것이다. –결국 의미 부여는 사람들의 합의에 기반하므로– 전쟁의 시기에 요구되는 리더십과 평화의 시기에 부여되는 리더십이 다르듯 맥락에 따라 부여되는 가치는 다르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주어진 정보를 기반으로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 그 가치를 바탕으로 그 사람이 사회에 더 필요한 사람인지 사회에 없는 게 나은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개별 사람이 가지는 가치의 합이지 사람의 수가 아니다.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최근에 다 읽은 <괴델, 에셔, 바흐>의 핵심적인 질문이기도 한 이 질문에 대한 나의 결론은 ‘그럴 것이다’ 이다.

내가 보기에 이 질문은 ‘인간의 사고를 정량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와 동일하다. 만일 인간의 사고를 정량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표현식을 실행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 기계를 실행하면 그 기계는 인간이 사고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를 수행하는 물리적 구조가 뉴런 네트워크이냐 실리콘으로 된 칩이냐 혹은 다른 구조물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사고 자체는 동일한 것이다. 튜링 머신은 실리콘으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용이 저렴하니까 실리콘으로 만드는 것일 뿐, 같은 논리 체계를 담아낼 수 있는 물리적 구조만 갖는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튜링 머신은 만들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많은 영역에서 우주의 특별한 존재라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지만, 인류 지식의 역사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과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이미 자신들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특별하지 않음을 이해하고 있으며, 시간이 충분히 지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하게 되면 인간은 심지어 기계에 비해서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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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어떤 일이든 비슷하긴 하지만, 디자인 역시 생각이 8할이다. 올바른 생각을 했다면, 그것을 실체화하는 것은 그냥 시간을 들이면 되는 일일 뿐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정량화 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닌 반면, 일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고 정량화 할 수 있는 활동이라 대개의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거꾸로 생각하게 마련이다만.

디자이너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며, 마지막으로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지식은 분야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늘 바뀌는 것이지만, 인간이나 세상에 대한 이해는 어느 분야에서나 통용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수명으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없어질 때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 사실상 고정적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한 번만 제대로 배우면 그 뒤는 쉽다. 더불어 우리가 만드는 결과물은 결국 인간과 이 세상을 위한 것이므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디자인한다면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글은 여기저기 많으니 굳이 내가 덧붙일 만한 것은 없고, 이 글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내 생각을 좀 이야기해 보겠다. 글의 주제는 단순하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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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와 유행과 디자이너

가치는 누적되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누적이다. 지식을 저장할 수 있는 수단 –문자– 의 발명 덕분에 인류의 문명은 석기를 다루던 시대에서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누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 같은 파괴적 시기를 맞이하지 않는 한 인류의 문명은 앞으로도 계속 상승할 것이고, 인류가 석기를 다루는 시대로 다시 돌아갈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명이나 지식은 가치의 예이다. 가치는 파괴 되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쌓이며, 쌓인 가치는 다른 가치의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1]

바닥에 흩어져 있는 단추를 실을 이용하여 무작위로 연결해 나갈 때 단추당 연결된 실의 비율이 1이 넘어서면 갑자기 대규모 군집이 나타나는 것처럼 –이러한 지점을 변곡점 혹은 티핑 포인트라고 한다– 가치도 일정 수준이상 쌓이면 변곡점를 맞이하여 가치가 폭발하는 시점이 생긴다. 과학사의 뛰어난 인물들이 특정 시점이나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치가 폭발하는 시점에서는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지만, 그 폭발력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기 때문에 [2]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가치 상승이 다시 완만한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그래프로 그리면 S자 모양의 그래프가 그려진다.

재미있는 점은 완만한 시기가 한동안 지속된 후 다시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여 가치가 폭발하고, 폭발력이 힘을 다하면 다시 완만한 시기에 접어들고 하는 흐름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면 계단과 같은 모양이 된다. 나심 탈레브는 역사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도약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가치가 쌓일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은 파괴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인류는 전쟁이나 광기에 의해 문명이나 지식이 파괴되는 일을 여러번 겪어 왔다. 대체적으로 가치는 우상향 하지만, 파국적인 이벤트로 가치는 절벽을 맞이하기도 한다.

 

유행은 순환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순환이다. 혁명가가 새로운 국가 –혹은 시스템– 를 건국하면 초기엔 새로운 시스템을 기반으로 융성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부패와 불평등이 쌓여 쇠락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혁명가가 나타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 –최근에 중국 기업이 한국 기업들과 달리 평등하고 합리적인 기업 문화를 갖고 있다는 글을 봤는데, 나는 이것이 미국-중국과 한국의 차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기업과 오래된 기업의 차이라고 본다. 한국에도 새로운 기업들은 평등하고 합리적인 기업 문화를 갖고 있으며 미국이나 중국의 오래된 기업은 계층적이고 경직된 구조를 갖고 있다. 더불어 나는 신생 기업들의 평등한 기업 문화가 더 합리적이다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이 글의 논의를 벗어나는 내용이므로 생략한다.

유행이라는 것도 순환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이와 같다. –물론 일반적으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순환하는 것들 중에서 주기가 짧은 것을 말한다– 어떤 새로운 유행이 인기를 끌다가 시간이 지나 인기가 수그러들면 새로운 유행이 나타나 기존 유행을 대체한다.

융성했다가 쇠락했다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것이 나타나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유행의 그래프는 Sine 함수와 비슷한 모양으로 볼 수 있다.

하나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래프는 순환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모양의 도형을 순환할 때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비가역적인– 시간 개념을 적용하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래프가 그려진다.

원형 그래프를 예로 들었지만 이것이 꼭 원형일 이유는 없다. 타원형일 수도 있고, 찌그러진 원일 수도 있고 아예 원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원이 아니라면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래프는 부드럽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모양이 아니라 ‘순환적’이라는 부분이다. 니체가 이야기한 ‘영원회귀’는 바로 이러한 세상의 순환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는 가치와 유행이 겹쳐져 있다.

인류 문명의 발전만 보면 세상은 끝없이 발전할 것 같고,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만 보면 세상은 끝없이 제자리를 돌 것 같지만, 현실 세계는 이 둘이 겹쳐져 나타난다. 우리는 누적되는 가치 위에 유행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둘이 겹쳐져 있다는 이야기는 이 둘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는 너무 복잡하므로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일단 무시한다.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에 대해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통해 단순히 제자리에서 도는 것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는데 –그림으로 그리자면 나선형 모양– 이는 기존의 회귀적인 세계관과 직선적인 세계관을 통합한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그 둘이 공존한다는 점은 나도 동의하지만, 가치가 선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선형 보다 복잡한 그래프가 그려진다고 생각한다.

 

가치는 좋고 유행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나는 가치를 유행보다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좋고 나쁨은 받아 들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면 좋고 유행이면 나쁘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세상에 적합하지 않은 가치를 –Market Fit이 되지 않는– 추구하는 것은 지나간 유행을 쫓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이다. 반면 유행을 추구하더라도 유행을 선도하는 입장에 있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 가치는 진입 –Entry– 시점이 중요하고 유행은 빠져 나오는 –Exit– 시점이 중요하다.

가치냐 유행이냐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가치와 유행과 디자이너

삶에서 가치를 따를지 유행을 따를지는 오로지 자신의 결정이다. 그러나 특정한 전문성을 요하는 역할을 맡는 사람이라면 유행 보다는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 한다.

세상에는 항상 새로운 유행이 나오기 때문에, 자신이 추구한 유행이 저물고 새로운 유행이 인기를 끌면 그간 쌓아온 것들을 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큐어모픽이나 플랫 디자인은 모두 유행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 다시 말해 인간 자체 –인지공학, 심리학, 미학, 사회학 등– 나 자신이 다루는 제품에 대한 이해에 집중한다면 유행이 아무리 많이 바뀌어도 자신이 쌓아온 것들의 가치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자신이 가치를 쌓는 만큼 가치의 수준은 높아질 것이다.


[1]: 물론 우주에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눈이 녹기 전에 새로운 눈이 내리면 눈이 쌓이는 것과 같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2]: 폭발력의 반대 방향으로 –위 예시에서는 위로 오르는 힘과 반대로 아래로 잡아 당기는– 작용하는 힘은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엔트로피 때문에 질서는 영원할 수 없지만, 무질서는 영원할 수 있다.

디자인, 디자이너

내 직업적 정체성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가끔 계신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나는 나의 직업적 정체성이 ‘디자이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한데, 내가 가진 프로그래밍이나 기타 여러 능력들이 보잘 것 없는 수준인 반면 내가 가진 디자인 능력은 나의 다른 능력들에 비해 몇 배는 낫기 때문이다.

나의 직업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함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한다’는 격언에 따라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몇 번의 글을 통해 정리해 보겠다.

디자인

나는 어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을 두 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퍼뜨릴 어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만든 가치를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면 제품 개발은 전자에 마케팅은 후자에 대응 시킬 수 있을 것이고, 학자가 하는 일이라면 연구를 통해 지식을 만드는 일을 전자에 책이나 논문으로 출판하는 것 후자에 대응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치를 잘 만들었으나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나, 사람들에게 퍼뜨리기는 잘 하지만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것을  퍼뜨리는 것 모두 좋은 결과를 이루기는 어렵다. 좋은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을 모두 잘해야 비로소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가치를 만드는 일은 다시 가치를 구성하는 과정과 그것을 실체화 하는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나에게 디자인이란 ‘가치를 목적에 맞게 구성하거나 발전시키는 과정’의 일을 의미한다. –프로그래밍이나 아트 같은 작업은 구성된 가치를 실체화 하는 과정의 일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디자인을 문제 해결에 비유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옳다고 생각하는데 가치를 구성해 내지 못하는 문제 해결은 그저 문제 풀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 문제 잘 푸는 사람을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디자인을 ‘설계’에 대응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만 옳다고 생각하는데, 디자인이 실체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기는 하지만 한 번 계획을 세운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화된 결과물을 보고 꾸준히 개선하는 과정 자체를 디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가치를 실체화 되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 어떻게 동작할지에 대한 것 등– 의 일이며 디자인의 가치는 오로지 실체화된 결과물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디자인의 가치가 실체화된 결과물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디자인을 하려면 디자인을 일단 실제 결과물로 만들고 이를 개선 하여 다시 만들고 이를 다시 개선하고의 과정 –때로는 밥상 뒤엎기도 해야 한다– 을 끊임 없이 거쳐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필휘지의 명필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한 한 번에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며 끊임 없이 피드백을 받으며 디자인을 발전시켜야만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을 오래도록 쌓아가면 언젠가는 디자인에 있어 일필휘지의 명필 수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선 그림을 많이 그려봐야 하는 것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 별로 복잡해 보이지 않는 루이스를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했는지 알면 다들 놀랄 것이다. 솔직히 나 스스로도 놀랐다.

디자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좋은 디자이너라면 가치를 구성 하거나 발전 시킴에 있어 눈에 보이는 부분을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행태는 구조에서 비롯한다. 구조에 대한 이해와 개선 없이 행태에 초점을 맞춘 가치는 일시적일 뿐 지속성이 없다.

디자이너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디자인은 디자이너만 하는 것이 아니며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축구 경기에서 수비수라고 수비만 하거나 공격수라고 공격만 하지 않는다. 수비수도 공격 상황이 되면 올라가서 공격에 가담하고, 공격수도 수비 상황이 되면 내려와서 압박을 돕는다. 수비수가 수비만 하고 공격수가 공격만 하는 팀은 망한다. 모든 팀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훌륭한 팀이 된다.

공격수가 공격을 책임지고 수비수가 수비를 책임지 듯,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디자인 과정에는 모든 팀원이 함께 해야 한다. 다양한 피드백이 디자인을 더 좋게 만들 듯이 다양한 역할을 하는 다양한 팀원들의 시각이 더해질 때 디자인은 더욱 좋아진다.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이 디자인에 참여 하듯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이 아닌 일에도 참여 해야 한다. 간단한 스크립트 작업을 통해 프로그래머의 일을 덜어주는 것이 그 한 예인데, 이는 프로그래머가 디자이너의 자잘한 요구 사항을 모두 구현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기능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프로젝트의 효율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빠르게 확인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이 내용을 ‘디자이너는 프로그래밍을 배워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글을 쓸 예정이다.

제품을 디자인 하는 것만 디자인이 아니다. 디자인은 어느 작업에나 녹아 있다. 프로그래머나 아티스트가 자신의 결과물을 개선하는 과정도 분야와 층위는 다르지만 일종의 디자인이다. 이미 누구나 디자인을 하고 있으며,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이 아닌 일을 한다. 현실 세계의 일이 늘 그러하듯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디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작업은 많은 경우에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게 마련이다. 어쨌든 기능이 갖춰지면 제품은 완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조직에서 디자인에 투입하는 비용은 아끼게 되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디자이너라도 이미지를 다루거나 스크립트를 다루는 것과 같은 눈에 보이는 일을 하는데 역량을 집중하여 형편 없는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문제는 디자인의 가치를 이해 못하는 리더의 문제에 가깝지만 개별 디자이너들 역시 자신의 핵심 역량은 겉으로 드러나는 스킬셋이 아닌 디자인 자체에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이 죽었다.

사람의 몸은 10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각 세포는 100조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사람이 죽은 후 그 사람을 이루었던 원자들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 사람의 일부는 땅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쓸려 흙 속에 녹아든 원자들 중 일부는 흙 속의 미생물들과 섞여 양분이 되었으며, 양분이 된 원자들은 여러 식물에 흡수되어 각기 식물의 일부가 되었다. 
식물의 일부가 되었던 원자들 중 일부는 동물의 먹이가 되어 동물의 일부가 되었고, 다른 일부는 식물의 꽃이 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씨앗이 되어 새로운 생명이 되었다.

그 사람의 일부는 물이 되었다.
내리는 비에 쓸려 강 속에 흘러들어간 원자들 중 일부는 물 속의 미생물들과 섞여 물고기의 먹이가 되었으며, 먹이가 된 원자들은 각기 물고기의 일부가 되었다.
물고기의 먹이가 되지 않은 원자들 중 일부는 강의 흐름을 따라 바다로 흘러 들어가 바다가 되었고, 바다가 된 일부 중 일부는 추위와 함께 빙산이 되었고 다른 일부는 바람과 함께 파도가 되었다.

그 사람의 일부는 바람이 되었다.
부는 바람에 쓸려 바람이 된 원자들 중 일부는 수증기와 섞여 구름이 되었고, 구름이 된 원자들 중 일부는 비가 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번개가 되었으며, 또 다른 일부는 태풍이 되었다.

그 사람의 일부는 우주가 되었다.
바람이 되었던 그 사람의 일부는 복사 에너지와 함께 지구를 떠났고, 인간에겐 길지만 우주에겐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주의 많은 곳으로 흩어져서 각기 에너지가 되고, 별이 되고, 행성이 되고, 지구에서 머나먼 행성에서 새로운 생명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이기 이전에 우주였고, 
찰나의 시간 동안 우주의 일부가 모여 우리가 되었다가,
그 시간이 다 한 후에 다시 우주로 돌아간다.
우리는 모두 우주 일부이며, 우주는 모두 연결 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게임 시장의 흐름 읽기

최근 배우고 있는 경제학 관련한 것에 더해
얼마 전 애플이 자사의 휴대용 기기들에 ‘게임센터’를 추가하여 본격적으로 게임 시장에 진입했다는 기사를 접한 것과
어제 제가 스터디 모임을 하고 있는 모 스터디 그룹에서 ‘아케이드 슈팅게임의 계보’를 훑으면서 슈팅게임의 흥망성쇠에 대해 회원분들과 한 토론 내용이 합쳐져서
‘그래 이거다’ 하는 뭔가 그럴싸한 영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름하여 ‘게임 시장의 흐름 읽기’ 인데
사실 매우 간단하고 기초적인 것이라 영감이라 표현하기도 민망하군요

여튼 그것이 무슨 내용인가 하면
제품수명주기이론(PLC, Product Life Cycle)을 통해 바라 본 게임시장의 흐름에 관한 것입니다

자, 저 위의 그래프를 이해하시려면 먼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다 수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지구나 태양도 수명이 있고
사람이 만들어낸 사회 시스템 이를테면 조직이나 국가도 수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제품이라는 것도 수명이 있습니다
물론 그 수명이라는 것이 모두 위의 그래프와 같은 모양은 아니겠습니다만
 –어떠한 것들은 생명이 시작된 직후부터 우하향 곡선을 그릴 수도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생명력을 가진 것들의 수명 그래프는 바로 저 위의 그래프와 같은 식일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기를 거쳐 청년, 장년을 거쳐 노년으로 접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품의 수명도 도입기-성장기-성숙기-쇠퇴기를 거치게 마련입니다
 –물론 성장기도 못보고 망하는 제품도 있게 마련입니다만 여기서는 제외하겠습니다

이러한 제품의 수명주기는 문화 상품이라고 다를 것이 없어서
모든 게임들 역시 저와 같은 생명 주기를 가지게 마련입니다
잘 나가는 게임이 영원히 잘 나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재미 있는 것이라도 오래하면 질리게 마련이라 기존의 플레이어들은 떠나가게 되고
게임이 오래 유지되면 또 그만큼 진입 장벽이 높아져서 새로운 플레이어들의 유입이 적어지면 쇠퇴기를 맞게 마련입니다
 –플레이어들이 성장하는만큼 게임도 외적, 내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진입장벽이 점점 높아지지요
때문에 대부분의 퍼블리셔는 성숙기를 길게 늘리거나 쇠퇴기를 완만하게 유지하여 매출을 유지하려 하는 것이지요

자 여기까지는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내용이었습니다
뭐 극히 자연스러운 내용이라 딱히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수준의 것으로
사실 제가 따로 설명드릴 필요도 없이 누구나 다 알만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제가 맨 처음에 잠깐 언급했던
아케이드 슈팅 게임의 흐름도 역시 위의 그래프와 같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 -> 갤러그 -> 제비우스를 거치며 성장세를 기록하던 아케이드 슈팅 게임들은 이후 성숙기를 거쳐 지금은 사실상 쇠퇴기를 맞이한지도 꽤 되었다고 봐야겠죠
 –아케이드 슈팅은 초보자가 하기엔 너무 어려운 수준이 되어버렸죠
    잘하는 사람들만 남아서 그들만의 리그가 된 느낌도 납니다

그럼 여기서 살짝만 더 복잡한 내용을 설명드리기로 하죠
무엇인지 바로 이야기하면 재미없으니 일단 예를 들어 보자면
만일 어느 회사가 예를 들어 A라는 회사가 I라는 휴대폰을 만든다고 칩시다
그 회사가 I라는 휴대폰을 딱 하나만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요?

이 그래프는 제품의 수명주기이지만 만일 회사가 단일 제품만 가지고 있다면 그 회사의 운명도 바로 저 그래프와 같은 모습을 그릴 것입니다
제품이 하나 밖에 없는데 제품이 더는 안 팔린다면 회사는 끝난 것이지요
아주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자 그런데 만일 이 A사가 I라는 휴대폰 외에 IP라는 ebook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 회사의 그래프는 어떻게 될까요?

검은선은 각 제품의 수명주기로 보고
붉은선은 회사의 성장세라고 보시면 됩니다

휴대폰이 쇠퇴기에 이를 즈음해서 ebook이 성숙기를 맞이하여 회사의 매출을 끌어 올립니다
재미있는 일입니다 하위 요소라 볼 수 있는 단일 제품은 쇠퇴기를 맞이했지만 상위 요소인 회사는 성장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사실 모든 회사는 끝없이 성장을 해야 합니다
침체는 물론이고 정체 역시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직원들 월급이 오르니까요
 –월급 안 올려주면 직원들이 회사 나가겠죠?
때문에 회사를 경영할 때는 적절하게 후속 혹은 대체 제품을 내놓아서 지속적으로 회사의 성장을 이끌어야 합니다

각설하고 위와 같은 일이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해 드린 대로 아케이드 슈팅게임 자체는 쇠퇴기를 맞이했지만
아케이드 시장은 성장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건 바로 대전 격투 게임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대전 격투 게임이 쇠퇴기를 맞이한 후에는 리듬 게임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 주어 아케이드 시장은 유지 되었습니다만
아쉽게도 현재는 그 리듬 게임들마저도 쇠퇴기에 이르고 그 뒤를 받쳐 줄 게임이 없어서
 –여기서 릴게임 얘기하시면 곤란합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아케이드 시장이 쇠퇴기를 맞이 하게 됩니다
 –사실 외국 자료는 제가 몰라서 이 얘기는 국내로만 한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국내 게임 시장이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슈팅 게임의 위치를 대전 격투가 대체해준 것처럼
아케이드 게임의 위치를 온라인 게임이 대체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PC 패키지 이야기는 슬퍼지므로 하지 않겠습니다

슈팅 -> 대전격투 -> 리듬게임이 아케이드 시장을 받쳐준 것처럼
온라인 게임도 스타크래프트 –논란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쓰겠습니다– 이후 FPS, MMORPG, 레이싱 게임, 스포츠 게임 등이 각자의 제품 주기를 가지고 번갈아가며 성장세를 유지해줘서 온라인 게임 시장은 꾸준히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성장세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대체품이 나오지 않는 이상 오래지나지 않아 쇠퇴기를 맞이할 수 밖에 없고 결국에 가서는 아케이드 게임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플랫폼에 시장을 넘겨줄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요
 –어떤 플랫폼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냐고 저에게 묻지 마십시오 
    저는 원칙에 따라 큰 시각에서 전체적인 방향만 읽고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식으로만… 
    은 훼이크구염 그걸 알면 제가 여기서 이런 글 쓰고 있겠음?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시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여튼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왠지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대로 망해가고 관계자들은 그 시간을 늘리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할 것처럼 이해되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선 살짝 더 복잡한 내용을 설명드려야겠군요

딱히 물리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지 않으셨더라도
열역학 제 2 법칙이나 엔트로피의 법칙 정도는 많이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실 제가 복잡하게 말할 만큼 이해도가 없어서…–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인 엔트로피로 변하는데
그 역으로는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때문에 외부와의 교류가 없는 닫힌계라는 시스템하에서는 엔트로피는 쌓이는 방향으로만 진행되어 결국에 가서는 에너지는 전혀 없고 엔트로피만 가득차서 계가 정지해 버리게 됩니다
위에 이야기된 거스를 수 없는 필연적인 종말을 향해가는 것이 바로 이 모습이라 할 수 있지요

반면 외부와의 교류가 있는 열린계라는 시스템하에서는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영입되어 쌓인 엔트로피를 외부로 배출하고 얻은 에너지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한 항상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내용이 바로 이겁니다
무언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엔트로피가 아닌 계속된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굳이 하위의 새로운 대체제를 발굴하지 않고도 말이지요

저는 이러한 에너지를 ‘혁신’이라고 이해하는데 
 –이와 더불어 ‘개선’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혁신이 무언가를 하기 위한 방향 설정이라면
    개선이란 그곳에 다다르기 위한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혁신만 해낼 수 있다면 쇠퇴기에서도 성장세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래 그래프와 같이 말이지요

쇠퇴기에 접어들어 이제 망하는 길만 남은 줄 알았던 제품의 수명이
혁신이라는 에너지를 주입받고 마치 열린계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듯이 새로운 성장 곡선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혹 그래프만 보고 ‘세상에 그런 게 어딨냐?’ 싶겠지만
실제로 2D 대전 격투이후 3D 대전 격투라는 혁신이 위와 같은 그래프를 그리게 했고
그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습니다
 –만 여백이 부족하여 찾지 않겠습니다

계속 기존의 것만 답습하는 형태로 개선만 이루어서는 플레이어들에게 외면을 받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항상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데 선택사항이 많으니 굳이 기존의 것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개선은 양의 기울기를 키우거나 음의 기울기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한 번 지나간 성장세를 다시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오로지 혁신만이 새로운 성장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지요

현재 수많은 온라인 게임들이 존재하고 각 온라인 게임들은 여러 장르가 돌아가며 현재의 온라인 게임 시장의 성장세를 이끌었습니다만
앞으로 새로운 장르(대체제)의 발견이 없다면 그리고 기존의 것에 대한 혁신도 없다면
슈팅이 대전격투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아케이드가 온라인게임에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온라인 게임도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모바일 환경이나 웹게임 같은 차세대 흐름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킬 수 있으리라는 장담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얘기는 국내 한정이라 해외 수출하면 되긴 하겠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게임에 대한 수요 자체는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잠재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80년대 게임하던 10대 청소년들이 노인인구가 될때까지
    전세계로 보아도 아직 게임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저소득 국가에 널리 보급될 때까지
    사실 이 때문에 애플이나 구글 같은 기업들도 게임 산업에 발을 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굳이 온라인 게임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시대의 흐름을 적절히 타는 것도 괜찮겠지요

첨언하자면
위의 얘기는 온라인 게임이라고만 했지만 사실 이는 가정용 콘솔을 대입해도 마찬가지리라 봅니다
가정용 콘솔이 등장한 이래 수없는 콘솔 기기들이 그래픽적 개선만을 통해 발달해 왔는데 
다행히 하위 요소라 할 수 있는 각 게임들의 여러 장르의 게임들의 발달로 여지껏 성장세를 이어왔지만
이후로도 계속 그 흐름이 유지될 수 있으리라는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괜히 다음세대 콘솔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이 아니죠
다행히 Wii가 가정용 콘솔로서 혁신을 이루어 냈지만
이 외에도 증강현실이든 3D든 뭐든 아직은 상상하기 힘든 더욱 다양한 혁신들이 쏟아져야 가정용 콘솔의 성장세가 이어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물론 고사양 게임에 대한 수요가 꽤나 높기 때문에 가정용 콘솔이 쇠퇴기를 맞는다고 할지라도 아케이드와 같은 수준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 보이긴 합니다만 말이지요

이 글은 지금까지 게임 시장의 흐름이 어떻게 변화해 왔고 그러므로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이다라고 예측하는 내용의 글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지금의 게임 시장이 어떠한 흐름에 위치해 있는지 성장기인지 성숙기인지 쇠퇴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냥 지금까지 변화해 온 게임 시장의 흐름을 보고 그 거대한 흐름을 이해해 보고
그에 맞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시장의 흐름에 대해 영리하게 대응해 보자는 내용의 글입니다

시장이 성숙기를 지나 쇠퇴기를 맞이할 때
새로운 플랫폼으로 갈아 탈 것인지
같은 플랫폼 내에 대체 장르를 만들어 낼 것인지
같은 플랫폼 내에 기존의 장르에 혁신을 이루어 낼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