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긴 생각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최근에 다 읽은 <괴델, 에셔, 바흐>의 핵심적인 질문이기도 한 이 질문에 대한 나의 결론은 ‘그럴 것이다’ 이다.

내가 보기에 이 질문은 ‘인간의 사고를 정량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와 동일하다. 만일 인간의 사고를 정량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표현식을 실행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 기계를 실행하면 그 기계는 인간이 사고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를 수행하는 물리적 구조가 뉴런 네트워크이냐 실리콘으로 된 칩이냐 혹은 다른 구조물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사고 자체는 동일한 것이다. 튜링 머신은 실리콘으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용이 저렴하니까 실리콘으로 만드는 것일 뿐, 같은 논리 체계를 담아낼 수 있는 물리적 구조만 갖는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튜링 머신은 만들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많은 영역에서 우주의 특별한 존재라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지만, 인류 지식의 역사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과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이미 자신들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특별하지 않음을 이해하고 있으며, 시간이 충분히 지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하게 되면 인간은 심지어 기계에 비해서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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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어떤 일이든 비슷하긴 하지만, 디자인 역시 생각이 8할이다. 올바른 생각을 했다면, 그것을 실체화하는 것은 그냥 시간을 들이면 되는 일일 뿐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정량화 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닌 반면, 일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고 정량화 할 수 있는 활동이라 대개의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거꾸로 생각하게 마련이다만.

디자이너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며, 마지막으로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지식은 분야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늘 바뀌는 것이지만, 인간이나 세상에 대한 이해는 어느 분야에서나 통용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수명으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없어질 때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 사실상 고정적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한 번만 제대로 배우면 그 뒤는 쉽다. 더불어 우리가 만드는 결과물은 결국 인간과 이 세상을 위한 것이므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디자인한다면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글은 여기저기 많으니 굳이 내가 덧붙일 만한 것은 없고, 이 글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내 생각을 좀 이야기해 보겠다. 글의 주제는 단순하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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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와 유행과 디자이너

가치는 누적되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누적이다. 지식을 저장할 수 있는 수단 –문자– 의 발명 덕분에 인류의 문명은 석기를 다루던 시대에서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누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 같은 파괴적 시기를 맞이하지 않는 한 인류의 문명은 앞으로도 계속 상승할 것이고, 인류가 석기를 다루는 시대로 다시 돌아갈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명이나 지식은 가치의 예이다. 가치는 파괴 되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쌓이며, 쌓인 가치는 다른 가치의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1]

바닥에 흩어져 있는 단추를 실을 이용하여 무작위로 연결해 나갈 때 단추당 연결된 실의 비율이 1이 넘어서면 갑자기 대규모 군집이 나타나는 것처럼 –이러한 지점을 변곡점 혹은 티핑 포인트라고 한다– 가치도 일정 수준이상 쌓이면 변곡점를 맞이하여 가치가 폭발하는 시점이 생긴다. 과학사의 뛰어난 인물들이 특정 시점이나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치가 폭발하는 시점에서는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지만, 그 폭발력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기 때문에 [2]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가치 상승이 다시 완만한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그래프로 그리면 S자 모양의 그래프가 그려진다.

재미있는 점은 완만한 시기가 한동안 지속된 후 다시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여 가치가 폭발하고, 폭발력이 힘을 다하면 다시 완만한 시기에 접어들고 하는 흐름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면 계단과 같은 모양이 된다. 나심 탈레브는 역사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도약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가치가 쌓일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은 파괴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인류는 전쟁이나 광기에 의해 문명이나 지식이 파괴되는 일을 여러번 겪어 왔다. 대체적으로 가치는 우상향 하지만, 파국적인 이벤트로 가치는 절벽을 맞이하기도 한다.

 

유행은 순환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순환이다. 혁명가가 새로운 국가 –혹은 시스템– 를 건국하면 초기엔 새로운 시스템을 기반으로 융성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부패와 불평등이 쌓여 쇠락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혁명가가 나타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 –최근에 중국 기업이 한국 기업들과 달리 평등하고 합리적인 기업 문화를 갖고 있다는 글을 봤는데, 나는 이것이 미국-중국과 한국의 차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기업과 오래된 기업의 차이라고 본다. 한국에도 새로운 기업들은 평등하고 합리적인 기업 문화를 갖고 있으며 미국이나 중국의 오래된 기업은 계층적이고 경직된 구조를 갖고 있다. 더불어 나는 신생 기업들의 평등한 기업 문화가 더 합리적이다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이 글의 논의를 벗어나는 내용이므로 생략한다.

유행이라는 것도 순환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이와 같다. –물론 일반적으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순환하는 것들 중에서 주기가 짧은 것을 말한다– 어떤 새로운 유행이 인기를 끌다가 시간이 지나 인기가 수그러들면 새로운 유행이 나타나 기존 유행을 대체한다.

융성했다가 쇠락했다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것이 나타나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유행의 그래프는 Sine 함수와 비슷한 모양으로 볼 수 있다.

하나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래프는 순환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모양의 도형을 순환할 때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비가역적인– 시간 개념을 적용하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래프가 그려진다.

원형 그래프를 예로 들었지만 이것이 꼭 원형일 이유는 없다. 타원형일 수도 있고, 찌그러진 원일 수도 있고 아예 원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원이 아니라면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래프는 부드럽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모양이 아니라 ‘순환적’이라는 부분이다. 니체가 이야기한 ‘영원회귀’는 바로 이러한 세상의 순환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는 가치와 유행이 겹쳐져 있다.

인류 문명의 발전만 보면 세상은 끝없이 발전할 것 같고,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만 보면 세상은 끝없이 제자리를 돌 것 같지만, 현실 세계는 이 둘이 겹쳐져 나타난다. 우리는 누적되는 가치 위에 유행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둘이 겹쳐져 있다는 이야기는 이 둘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는 너무 복잡하므로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일단 무시한다.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에 대해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통해 단순히 제자리에서 도는 것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는데 –그림으로 그리자면 나선형 모양– 이는 기존의 회귀적인 세계관과 직선적인 세계관을 통합한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그 둘이 공존한다는 점은 나도 동의하지만, 가치가 선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선형 보다 복잡한 그래프가 그려진다고 생각한다.

 

가치는 좋고 유행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나는 가치를 유행보다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좋고 나쁨은 받아 들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면 좋고 유행이면 나쁘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세상에 적합하지 않은 가치를 –Market Fit이 되지 않는– 추구하는 것은 지나간 유행을 쫓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이다. 반면 유행을 추구하더라도 유행을 선도하는 입장에 있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 가치는 진입 –Entry– 시점이 중요하고 유행은 빠져 나오는 –Exit– 시점이 중요하다.

가치냐 유행이냐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가치와 유행과 디자이너

삶에서 가치를 따를지 유행을 따를지는 오로지 자신의 결정이다. 그러나 특정한 전문성을 요하는 역할을 맡는 사람이라면 유행 보다는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 한다.

세상에는 항상 새로운 유행이 나오기 때문에, 자신이 추구한 유행이 저물고 새로운 유행이 인기를 끌면 그간 쌓아온 것들을 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큐어모픽이나 플랫 디자인은 모두 유행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 다시 말해 인간 자체 –인지공학, 심리학, 미학, 사회학 등– 나 자신이 다루는 제품에 대한 이해에 집중한다면 유행이 아무리 많이 바뀌어도 자신이 쌓아온 것들의 가치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자신이 가치를 쌓는 만큼 가치의 수준은 높아질 것이다.


[1]: 물론 우주에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눈이 녹기 전에 새로운 눈이 내리면 눈이 쌓이는 것과 같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2]: 폭발력의 반대 방향으로 –위 예시에서는 위로 오르는 힘과 반대로 아래로 잡아 당기는– 작용하는 힘은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엔트로피 때문에 질서는 영원할 수 없지만, 무질서는 영원할 수 있다.

디자인, 디자이너

내 직업적 정체성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가끔 계신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나는 나의 직업적 정체성이 ‘디자이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한데, 내가 가진 프로그래밍이나 기타 여러 능력들이 보잘 것 없는 수준인 반면 내가 가진 디자인 능력은 나의 다른 능력들에 비해 몇 배는 낫기 때문이다.

나의 직업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함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한다’는 격언에 따라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몇 번의 글을 통해 정리해 보겠다.

디자인

나는 어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을 두 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퍼뜨릴 어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만든 가치를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면 제품 개발은 전자에 마케팅은 후자에 대응 시킬 수 있을 것이고, 학자가 하는 일이라면 연구를 통해 지식을 만드는 일을 전자에 책이나 논문으로 출판하는 것 후자에 대응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치를 잘 만들었으나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나, 사람들에게 퍼뜨리기는 잘 하지만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것을  퍼뜨리는 것 모두 좋은 결과를 이루기는 어렵다. 좋은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을 모두 잘해야 비로소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가치를 만드는 일은 다시 가치를 구성하는 과정과 그것을 실체화 하는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나에게 디자인이란 ‘가치를 목적에 맞게 구성하거나 발전시키는 과정’의 일을 의미한다. –프로그래밍이나 아트 같은 작업은 구성된 가치를 실체화 하는 과정의 일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디자인을 문제 해결에 비유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옳다고 생각하는데 가치를 구성해 내지 못하는 문제 해결은 그저 문제 풀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 문제 잘 푸는 사람을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디자인을 ‘설계’에 대응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만 옳다고 생각하는데, 디자인이 실체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기는 하지만 한 번 계획을 세운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화된 결과물을 보고 꾸준히 개선하는 과정 자체를 디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가치를 실체화 되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 어떻게 동작할지에 대한 것 등– 의 일이며 디자인의 가치는 오로지 실체화된 결과물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디자인의 가치가 실체화된 결과물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디자인을 하려면 디자인을 일단 실제 결과물로 만들고 이를 개선 하여 다시 만들고 이를 다시 개선하고의 과정 –때로는 밥상 뒤엎기도 해야 한다– 을 끊임 없이 거쳐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필휘지의 명필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한 한 번에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며 끊임 없이 피드백을 받으며 디자인을 발전시켜야만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을 오래도록 쌓아가면 언젠가는 디자인에 있어 일필휘지의 명필 수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선 그림을 많이 그려봐야 하는 것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 별로 복잡해 보이지 않는 루이스를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했는지 알면 다들 놀랄 것이다. 솔직히 나 스스로도 놀랐다.

디자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좋은 디자이너라면 가치를 구성 하거나 발전 시킴에 있어 눈에 보이는 부분을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행태는 구조에서 비롯한다. 구조에 대한 이해와 개선 없이 행태에 초점을 맞춘 가치는 일시적일 뿐 지속성이 없다.

디자이너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디자인은 디자이너만 하는 것이 아니며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축구 경기에서 수비수라고 수비만 하거나 공격수라고 공격만 하지 않는다. 수비수도 공격 상황이 되면 올라가서 공격에 가담하고, 공격수도 수비 상황이 되면 내려와서 압박을 돕는다. 수비수가 수비만 하고 공격수가 공격만 하는 팀은 망한다. 모든 팀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훌륭한 팀이 된다.

공격수가 공격을 책임지고 수비수가 수비를 책임지 듯,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디자인 과정에는 모든 팀원이 함께 해야 한다. 다양한 피드백이 디자인을 더 좋게 만들 듯이 다양한 역할을 하는 다양한 팀원들의 시각이 더해질 때 디자인은 더욱 좋아진다.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이 디자인에 참여 하듯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이 아닌 일에도 참여 해야 한다. 간단한 스크립트 작업을 통해 프로그래머의 일을 덜어주는 것이 그 한 예인데, 이는 프로그래머가 디자이너의 자잘한 요구 사항을 모두 구현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기능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프로젝트의 효율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빠르게 확인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이 내용을 ‘디자이너는 프로그래밍을 배워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글을 쓸 예정이다.

제품을 디자인 하는 것만 디자인이 아니다. 디자인은 어느 작업에나 녹아 있다. 프로그래머나 아티스트가 자신의 결과물을 개선하는 과정도 분야와 층위는 다르지만 일종의 디자인이다. 이미 누구나 디자인을 하고 있으며,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이 아닌 일을 한다. 현실 세계의 일이 늘 그러하듯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디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작업은 많은 경우에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게 마련이다. 어쨌든 기능이 갖춰지면 제품은 완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조직에서 디자인에 투입하는 비용은 아끼게 되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디자이너라도 이미지를 다루거나 스크립트를 다루는 것과 같은 눈에 보이는 일을 하는데 역량을 집중하여 형편 없는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문제는 디자인의 가치를 이해 못하는 리더의 문제에 가깝지만 개별 디자이너들 역시 자신의 핵심 역량은 겉으로 드러나는 스킬셋이 아닌 디자인 자체에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이 죽었다.

사람의 몸은 10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각 세포는 100조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사람이 죽은 후 그 사람을 이루었던 원자들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 사람의 일부는 땅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쓸려 흙 속에 녹아든 원자들 중 일부는 흙 속의 미생물들과 섞여 양분이 되었으며, 양분이 된 원자들은 여러 식물에 흡수되어 각기 식물의 일부가 되었다. 
식물의 일부가 되었던 원자들 중 일부는 동물의 먹이가 되어 동물의 일부가 되었고, 다른 일부는 식물의 꽃이 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씨앗이 되어 새로운 생명이 되었다.

그 사람의 일부는 물이 되었다.
내리는 비에 쓸려 강 속에 흘러들어간 원자들 중 일부는 물 속의 미생물들과 섞여 물고기의 먹이가 되었으며, 먹이가 된 원자들은 각기 물고기의 일부가 되었다.
물고기의 먹이가 되지 않은 원자들 중 일부는 강의 흐름을 따라 바다로 흘러 들어가 바다가 되었고, 바다가 된 일부 중 일부는 추위와 함께 빙산이 되었고 다른 일부는 바람과 함께 파도가 되었다.

그 사람의 일부는 바람이 되었다.
부는 바람에 쓸려 바람이 된 원자들 중 일부는 수증기와 섞여 구름이 되었고, 구름이 된 원자들 중 일부는 비가 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번개가 되었으며, 또 다른 일부는 태풍이 되었다.

그 사람의 일부는 우주가 되었다.
바람이 되었던 그 사람의 일부는 복사 에너지와 함께 지구를 떠났고, 인간에겐 길지만 우주에겐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주의 많은 곳으로 흩어져서 각기 에너지가 되고, 별이 되고, 행성이 되고, 지구에서 머나먼 행성에서 새로운 생명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이기 이전에 우주였고, 
찰나의 시간 동안 우주의 일부가 모여 우리가 되었다가,
그 시간이 다 한 후에 다시 우주로 돌아간다.
우리는 모두 우주 일부이며, 우주는 모두 연결 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게임 시장의 흐름 읽기

최근 배우고 있는 경제학 관련한 것에 더해
얼마 전 애플이 자사의 휴대용 기기들에 ‘게임센터’를 추가하여 본격적으로 게임 시장에 진입했다는 기사를 접한 것과
어제 제가 스터디 모임을 하고 있는 모 스터디 그룹에서 ‘아케이드 슈팅게임의 계보’를 훑으면서 슈팅게임의 흥망성쇠에 대해 회원분들과 한 토론 내용이 합쳐져서
‘그래 이거다’ 하는 뭔가 그럴싸한 영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름하여 ‘게임 시장의 흐름 읽기’ 인데
사실 매우 간단하고 기초적인 것이라 영감이라 표현하기도 민망하군요

여튼 그것이 무슨 내용인가 하면
제품수명주기이론(PLC, Product Life Cycle)을 통해 바라 본 게임시장의 흐름에 관한 것입니다

자, 저 위의 그래프를 이해하시려면 먼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다 수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지구나 태양도 수명이 있고
사람이 만들어낸 사회 시스템 이를테면 조직이나 국가도 수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제품이라는 것도 수명이 있습니다
물론 그 수명이라는 것이 모두 위의 그래프와 같은 모양은 아니겠습니다만
 –어떠한 것들은 생명이 시작된 직후부터 우하향 곡선을 그릴 수도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생명력을 가진 것들의 수명 그래프는 바로 저 위의 그래프와 같은 식일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기를 거쳐 청년, 장년을 거쳐 노년으로 접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품의 수명도 도입기-성장기-성숙기-쇠퇴기를 거치게 마련입니다
 –물론 성장기도 못보고 망하는 제품도 있게 마련입니다만 여기서는 제외하겠습니다

이러한 제품의 수명주기는 문화 상품이라고 다를 것이 없어서
모든 게임들 역시 저와 같은 생명 주기를 가지게 마련입니다
잘 나가는 게임이 영원히 잘 나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재미 있는 것이라도 오래하면 질리게 마련이라 기존의 플레이어들은 떠나가게 되고
게임이 오래 유지되면 또 그만큼 진입 장벽이 높아져서 새로운 플레이어들의 유입이 적어지면 쇠퇴기를 맞게 마련입니다
 –플레이어들이 성장하는만큼 게임도 외적, 내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진입장벽이 점점 높아지지요
때문에 대부분의 퍼블리셔는 성숙기를 길게 늘리거나 쇠퇴기를 완만하게 유지하여 매출을 유지하려 하는 것이지요

자 여기까지는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내용이었습니다
뭐 극히 자연스러운 내용이라 딱히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수준의 것으로
사실 제가 따로 설명드릴 필요도 없이 누구나 다 알만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제가 맨 처음에 잠깐 언급했던
아케이드 슈팅 게임의 흐름도 역시 위의 그래프와 같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 -> 갤러그 -> 제비우스를 거치며 성장세를 기록하던 아케이드 슈팅 게임들은 이후 성숙기를 거쳐 지금은 사실상 쇠퇴기를 맞이한지도 꽤 되었다고 봐야겠죠
 –아케이드 슈팅은 초보자가 하기엔 너무 어려운 수준이 되어버렸죠
    잘하는 사람들만 남아서 그들만의 리그가 된 느낌도 납니다

그럼 여기서 살짝만 더 복잡한 내용을 설명드리기로 하죠
무엇인지 바로 이야기하면 재미없으니 일단 예를 들어 보자면
만일 어느 회사가 예를 들어 A라는 회사가 I라는 휴대폰을 만든다고 칩시다
그 회사가 I라는 휴대폰을 딱 하나만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요?

이 그래프는 제품의 수명주기이지만 만일 회사가 단일 제품만 가지고 있다면 그 회사의 운명도 바로 저 그래프와 같은 모습을 그릴 것입니다
제품이 하나 밖에 없는데 제품이 더는 안 팔린다면 회사는 끝난 것이지요
아주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자 그런데 만일 이 A사가 I라는 휴대폰 외에 IP라는 ebook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 회사의 그래프는 어떻게 될까요?

검은선은 각 제품의 수명주기로 보고
붉은선은 회사의 성장세라고 보시면 됩니다

휴대폰이 쇠퇴기에 이를 즈음해서 ebook이 성숙기를 맞이하여 회사의 매출을 끌어 올립니다
재미있는 일입니다 하위 요소라 볼 수 있는 단일 제품은 쇠퇴기를 맞이했지만 상위 요소인 회사는 성장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사실 모든 회사는 끝없이 성장을 해야 합니다
침체는 물론이고 정체 역시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직원들 월급이 오르니까요
 –월급 안 올려주면 직원들이 회사 나가겠죠?
때문에 회사를 경영할 때는 적절하게 후속 혹은 대체 제품을 내놓아서 지속적으로 회사의 성장을 이끌어야 합니다

각설하고 위와 같은 일이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해 드린 대로 아케이드 슈팅게임 자체는 쇠퇴기를 맞이했지만
아케이드 시장은 성장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건 바로 대전 격투 게임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대전 격투 게임이 쇠퇴기를 맞이한 후에는 리듬 게임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 주어 아케이드 시장은 유지 되었습니다만
아쉽게도 현재는 그 리듬 게임들마저도 쇠퇴기에 이르고 그 뒤를 받쳐 줄 게임이 없어서
 –여기서 릴게임 얘기하시면 곤란합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아케이드 시장이 쇠퇴기를 맞이 하게 됩니다
 –사실 외국 자료는 제가 몰라서 이 얘기는 국내로만 한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국내 게임 시장이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슈팅 게임의 위치를 대전 격투가 대체해준 것처럼
아케이드 게임의 위치를 온라인 게임이 대체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PC 패키지 이야기는 슬퍼지므로 하지 않겠습니다

슈팅 -> 대전격투 -> 리듬게임이 아케이드 시장을 받쳐준 것처럼
온라인 게임도 스타크래프트 –논란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쓰겠습니다– 이후 FPS, MMORPG, 레이싱 게임, 스포츠 게임 등이 각자의 제품 주기를 가지고 번갈아가며 성장세를 유지해줘서 온라인 게임 시장은 꾸준히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성장세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대체품이 나오지 않는 이상 오래지나지 않아 쇠퇴기를 맞이할 수 밖에 없고 결국에 가서는 아케이드 게임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플랫폼에 시장을 넘겨줄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요
 –어떤 플랫폼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냐고 저에게 묻지 마십시오 
    저는 원칙에 따라 큰 시각에서 전체적인 방향만 읽고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식으로만… 
    은 훼이크구염 그걸 알면 제가 여기서 이런 글 쓰고 있겠음?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시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여튼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왠지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대로 망해가고 관계자들은 그 시간을 늘리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할 것처럼 이해되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선 살짝 더 복잡한 내용을 설명드려야겠군요

딱히 물리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지 않으셨더라도
열역학 제 2 법칙이나 엔트로피의 법칙 정도는 많이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실 제가 복잡하게 말할 만큼 이해도가 없어서…–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인 엔트로피로 변하는데
그 역으로는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때문에 외부와의 교류가 없는 닫힌계라는 시스템하에서는 엔트로피는 쌓이는 방향으로만 진행되어 결국에 가서는 에너지는 전혀 없고 엔트로피만 가득차서 계가 정지해 버리게 됩니다
위에 이야기된 거스를 수 없는 필연적인 종말을 향해가는 것이 바로 이 모습이라 할 수 있지요

반면 외부와의 교류가 있는 열린계라는 시스템하에서는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영입되어 쌓인 엔트로피를 외부로 배출하고 얻은 에너지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한 항상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내용이 바로 이겁니다
무언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엔트로피가 아닌 계속된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굳이 하위의 새로운 대체제를 발굴하지 않고도 말이지요

저는 이러한 에너지를 ‘혁신’이라고 이해하는데 
 –이와 더불어 ‘개선’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혁신이 무언가를 하기 위한 방향 설정이라면
    개선이란 그곳에 다다르기 위한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혁신만 해낼 수 있다면 쇠퇴기에서도 성장세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래 그래프와 같이 말이지요

쇠퇴기에 접어들어 이제 망하는 길만 남은 줄 알았던 제품의 수명이
혁신이라는 에너지를 주입받고 마치 열린계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듯이 새로운 성장 곡선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혹 그래프만 보고 ‘세상에 그런 게 어딨냐?’ 싶겠지만
실제로 2D 대전 격투이후 3D 대전 격투라는 혁신이 위와 같은 그래프를 그리게 했고
그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습니다
 –만 여백이 부족하여 찾지 않겠습니다

계속 기존의 것만 답습하는 형태로 개선만 이루어서는 플레이어들에게 외면을 받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항상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데 선택사항이 많으니 굳이 기존의 것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개선은 양의 기울기를 키우거나 음의 기울기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한 번 지나간 성장세를 다시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오로지 혁신만이 새로운 성장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지요

현재 수많은 온라인 게임들이 존재하고 각 온라인 게임들은 여러 장르가 돌아가며 현재의 온라인 게임 시장의 성장세를 이끌었습니다만
앞으로 새로운 장르(대체제)의 발견이 없다면 그리고 기존의 것에 대한 혁신도 없다면
슈팅이 대전격투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아케이드가 온라인게임에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온라인 게임도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모바일 환경이나 웹게임 같은 차세대 흐름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킬 수 있으리라는 장담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얘기는 국내 한정이라 해외 수출하면 되긴 하겠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게임에 대한 수요 자체는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잠재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80년대 게임하던 10대 청소년들이 노인인구가 될때까지
    전세계로 보아도 아직 게임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저소득 국가에 널리 보급될 때까지
    사실 이 때문에 애플이나 구글 같은 기업들도 게임 산업에 발을 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굳이 온라인 게임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시대의 흐름을 적절히 타는 것도 괜찮겠지요

첨언하자면
위의 얘기는 온라인 게임이라고만 했지만 사실 이는 가정용 콘솔을 대입해도 마찬가지리라 봅니다
가정용 콘솔이 등장한 이래 수없는 콘솔 기기들이 그래픽적 개선만을 통해 발달해 왔는데 
다행히 하위 요소라 할 수 있는 각 게임들의 여러 장르의 게임들의 발달로 여지껏 성장세를 이어왔지만
이후로도 계속 그 흐름이 유지될 수 있으리라는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괜히 다음세대 콘솔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이 아니죠
다행히 Wii가 가정용 콘솔로서 혁신을 이루어 냈지만
이 외에도 증강현실이든 3D든 뭐든 아직은 상상하기 힘든 더욱 다양한 혁신들이 쏟아져야 가정용 콘솔의 성장세가 이어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물론 고사양 게임에 대한 수요가 꽤나 높기 때문에 가정용 콘솔이 쇠퇴기를 맞는다고 할지라도 아케이드와 같은 수준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 보이긴 합니다만 말이지요

이 글은 지금까지 게임 시장의 흐름이 어떻게 변화해 왔고 그러므로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이다라고 예측하는 내용의 글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지금의 게임 시장이 어떠한 흐름에 위치해 있는지 성장기인지 성숙기인지 쇠퇴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냥 지금까지 변화해 온 게임 시장의 흐름을 보고 그 거대한 흐름을 이해해 보고
그에 맞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시장의 흐름에 대해 영리하게 대응해 보자는 내용의 글입니다

시장이 성숙기를 지나 쇠퇴기를 맞이할 때
새로운 플랫폼으로 갈아 탈 것인지
같은 플랫폼 내에 대체 장르를 만들어 낼 것인지
같은 플랫폼 내에 기존의 장르에 혁신을 이루어 낼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놀이의 기원

근래 –사실 글 쓰기가 지금일 뿐 생각은 훨씬 이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만– 하고 있는 생각이 '원시행동' 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실제로 있는 표현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적절한 표현 수단이 없어 제가 임의로 명명한 단어라는 것을 생각해 주시고 
 –고로 이하의 모든 내용은 다 제 생각일 뿐임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하튼 이 원시행동이 뭐냐 하면 인류가 아직 부족 생활에 머물러 있을 때 생산 활동은 아닌 몇몇 행동들
예컨대 벽에 동물 그림을 그린다거나 부족민들끼리 모여 –지금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노래나 춤을 추던 행동들을 뜻합니다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에 보면 그 행동들을 학습적인 효과를 지닌 주술적인 행위라 말하는데
    책에서는 그것이 예술의 기원이라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그 행동들을 보자면 
그림, 춤, 노래라는 것을 보면 일종의 예술 행위라 할 수 있고
동물 그림으로 사냥물을 파악하고 춤, 노래 등으로 사냥간의 협동심을 길렀다는 것을 보자면 생산성을 높인다거나 사회성을 높이는 학습이라 할 수도 있고
그림, 춤, 노래를 통해 즐거움을 얻었다는 점에서 보면 놀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복합적인 모습을 지닌 이 행동을 저는 일단 원시행동이라 명명하였는데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제가 이를 통해 놀이의 기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사실 뇌나 진화, 진화심리학 등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때문에 연구가 아니라 생각 카테고리로 올립니다– 사람의 뇌는 태어날 때 무수한 가능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들은 이후 자라면서 학습되는 방향에 맞춰 최적화 되고 사용되지 않는 부분은 점점 버려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무엇이든 어릴 때 시작하는 것이 좋은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살아가면서 점점 최적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잘 쓰는 영역은 발달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버려진다
뇌가 소모하는 에너지를 생각해 볼 때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최적화 되는 것이 분명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는 진화라는 시스템이 가진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이 특성을 바로 저 원시행동에 대입하여 놀이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최초에 무수한 가능성을 지닌 원시 행동이
이후 인류의 사회화 과정을 거쳐 점점 그 추구하는 바에 맞게 최적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원시행동에서 학습, 숙련의 목적을 강화하여 최적화 한 것이 현재의 교육이 된 것이며
원시행동에서 미(美)적 추구 부분을 강화한 것이 현재의 예술이 되었으며
원시행동에서 재미, 즐거움 등의 추구가 강화된 것이 현재의 놀이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동들이 최적화가 되기는 했지만 –물론 앞으로도 계속 최적화가 되겠습니다만– 다른 행동들의 특성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어릴 때 영어 교육을 못 받아서 해당 영역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그 부분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영어는 충분히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 배우는 영어는 어릴 때 모국어와 같이 배운 영어에는 못 미치겠습니다만 어쨌든 영어를 배울 수는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집니다 
현재의 놀이도 재미와 즐거움 영역이 발달하기는 하였으나 원시행동에서의 학습효과나 미적추구가 남아 있기 때문에 놀이로서 학습이나 예술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놀이를 통해 문제이해-해결 능력을 기르거나 예술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만 놀이는 재미와 즐거움에 특화되었기 때문에 놀이란 일단 재미있는 것이 전제 되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다만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은 그 행동의 추구와 형태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인데
예컨대 예술을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행동이라 치면 회화, 조소, 노래, 소설, 시 등은 예술 행동을 하기 위한 형태로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소설이나 시라는 형태를 빌어 미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문학 예술이 되겠지요

이는 게임도 같은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만일 게임으로 놀이를 추구한다면 ‘게임.놀이()’ 그것은 하나의 놀이가 되고
 –이것은 가장 많은 형태의 게임입니다
게임이라는 형태를 빌어 학습을 추구한다면 ‘게임.학습()’ 그것은 학습이 되고
 –이것은 흔히 이야기하는 교육용 게임이 되겠지요
게임이라는 형태를 빌어 미적가치를 추구한다면 ‘게임.예술()’ 그것은 예술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마 인터랙티브 아트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쓰고 나니 좀 정리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요지는 간단합니다
어떠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그 행동이 지닌 추구를 봐야 하는 것이며
 –회화의 추구가 미적 가치가 아닌 재미나 즐거움이라면 그것은 놀이가 되겠지요
행동을 표현하는 형태는 얼마든지 다른 추구와 결합될 수 있다
그 이유는 ‘같은 원시행동에서 뻗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놀이 이해 – 게임과 플레이

이 글은 이전에 쓴 ‘게임 디자인 이해’와 같은 게임에 대한 이해 3부작 시리즈 중 2번째 글로
놀이에 대한 이해를 정리한 글입니다
어찌 보면 게임 개발하는데 이런 개념 이해가 굳이 필요한가 싶기도 한데
뭐 언제 어떻게든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리합니다

현재의 비디오 게임은 –컴퓨터 게임–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져서 비디오 게임은 놀이다라고 분명히 주장하기에도 무리가 있지만 저는 우선적으로 비디오 게임의 놀이적인 특성에 기반하여 아래의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 이전의 글에서 이번 글이 ‘놀이’, ‘게임’, ‘인터랙티브 미디어’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고 썼는데 글을 정리하니 인터랙티브 미디어에 대한 내용보다는 놀이에 대한 부분에 초점이 맞춰졌으니 그 점 이해하시고 글을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비디오게임을 바라보는 2가지 시선

오래 전에 쓴 글도 있지만
컴퓨터 게임의 학문적 접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2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컴퓨터 게임을 서사의 발전적인 형태로 보는 인터랙티브 내러티브의 접근 방법과
놀이의 새로운 형태로 보는 루돌로지의 접근 방법입니다

이전의 글에서 쓴 대로 사실 저는 두 가지 중 어느 한 방법에만 집중하지는 않지만
이 글은 게임의 재미에 초점을 맞춘 게임에 대한 이해 3부작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인터랙티브 내러티브보다는 루돌로지의 접근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사실 게임의 대한 학문적 접근은 놀이로서의 이해 보다 서사로서의 이해가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컴퓨터 게임이 매력적인 이야기를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사에 대한 학문적 이론이 이미 수천 년에 걸쳐 다듬어져 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서사의 관점에서 게임을 바라보는 서사론자(내러톨리지스트, Narratologist)들은 게임의 상호작용하는 텍스트에 초점을 맞추어 컴퓨터 게임의 학문적 이론의 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서사론자들에 의하여 게임에 대한 서사적 시각이 다듬어지는 와중에 이와 대비되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여 게임을 서사의 관점이 아닌 놀이의 관점으로서 게임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하게 됩니다
서사론자에 대비되어 놀이론자(루돌로지스트, Ludologist)라고 불리는 이들은 게임의 서사적인 플롯보다는 게임의 룰에 초점을 맞추어 게임을 놀이로서 이해하게 되는데 이때 이들은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루덴스’와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을 통해 놀이의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의 놀이 이해

호이징하는 놀이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으로서 
‘호모루덴스’를 통해 이전과 다른 개념의 놀이에 대한 정의를 내렸는데 
이 이론은 이후 다른 학자들이 놀이에 대한 연구를 할 때 기본 발판이 되게 됩니다
 –아래는 간단히 설명한 것으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직접 책을 읽어 봅시다

놀이란?
1. 놀이란 간접적이며 실제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움직임의 유일한 동기가 놀이 자체의 기쁨에 있는 정신적
   또는 육체적 활동이다
2. 놀이란 모든 참여자에 의해 인정받는 어떤 일정한 원칙과 규칙, 즉 ‘놀이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활동이며 거기에는 
   성취와 실패,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이 있다

놀이의 특징
1. 자유스러운 활동
2. 실재가 아닌 것
3. 장소와 지속성에 의해 일상적인 삶과 구분

호모루덴스는 최초로 놀이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로 큰 의의를 지니는 책으로
놀이의 정의와 특징에 대한 접근은 이루어냈지만
아쉽게도 놀이의 분류와 같은 더 깊은 부분에 대해선 접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플레이와 게임을 별개로 구분하는 개념도 아직 없던 시기 입니다
호이징하가 못한 놀이의 더 깊은 부분에 대한 접근은 이후 호이징하의 이론을 받아들인 로제 카이와가 시도하게 됩니다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의 놀이 이해

호이징하가 놀이 그 자체에 주목하여 놀이의 정의와 특징을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였다면 
카이와는 호이징하의 이론을 발전시켜 놀이의 특성에 따른 분류를 체계적으로 이뤄낸 사람입니다
카이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규칙’과 ‘의지’라는 요소를 이용해 그 유명한 아곤/알레아/미미크리/일링크스 분류법을 만들어 냈으며
루두스와 파이디아라는 놀이의 원리도 파악해 냈지요
 –아래는 간단히 설명한 것으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역시 직접 책을 읽어 봅시다

놀이의 형태
아곤(Agon) – 스포츠경기나 체스 같은 경쟁을 하는 놀이. 규칙과 의지가 동시에 작용
알레아(Alea) – 주사위 굴림, 복권 같은 운에 의한 놀이. 규칙은 있지만 의지가 없음
미미크리(Mimicry) – 흉내, 연극 같은 모의에 의한 놀이. 규칙은 없지만 의지는 있음
일링크스(Ilinx) – 그네, 곡예와 같은 지각의 안정을 파괴하는 현기증 놀이. 규칙도 없고 의지도 없음

놀이의 원리
루두스(Ludus) – 놀이의 규칙이 중시
파이디아(Paidia) – 놀이의 자유로운 행동이 중시
루두스와 파이디아는 일직선상의 양 극단에 위치하여 파이디아가 강해지면 루두스가 약해지고 루두스가 강해지면 파이디아가 약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카이와가 분류한 놀이의 형태는 다소 중복되는 것도 많고–실제로 카이와도 저 놀이의 형태가 여럿이 묶여서 나타난다고 합니다–저 4가지만으로는 다룰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 분류의 형태는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놀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했다는 것과 더불어 루두스와 파이디아라는 개념을 밝혀 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둡니다
 –사실 저 루두스와 파이디아라는 용어 자체는 호모 루덴스에서 먼저 언급이 되긴 합니다만 
저 용어를 이용하여 놀이의 원리를 파악해낸 것은 카이와에 이르러 된 것입니다

호모루덴스와 마찬가지로 이때까지도 플레이와 게임을 별개로 구분하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비디오게임의 등장 이후 등장한 놀이론자들이 카이와의 이 이론을 받아들여 그 둘의 구분을 시도하게 됩니다

 

곤살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의 놀이 이해

호이징하가 정의한 놀이를 계승하여 카이와가 발전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카이와가 밝혀낸 루두스와 파이디아의 개념을 이후 놀이론자들이 받아들여 발전시키게 됩니다

그 중 곤살로 프라스카는 루돌로지(Ludology)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놀이론자로서 카이와가 밝혀낸 루두스와 파이디아 개념을 받아들여 이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는 시도를 합니다

프라스카는 우선 파이디아에도 규칙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이전의 카이와가 루두스와 파이디아가 일직선상의 양 극단에 위치한다고 했던 내용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결과’의 존재 유무에 따라 루두스와 파이디아를 구분하여 분리하는 방법으로 아래와 같이 이론을 발전시킵니다

루두스(Ludus)
특수한 종류의 파이디아, 승리와 패배, 이익과 손실을 규정하는 규칙들의 체계하에 조직된 활동

파이디아(Paidia)
당장의 유용한 목적도 규정된 목표도 없는 풍부한 육체적 혹은 정신적 활동
파이디아는 루두스와 달리 미리 설계된 별도의 승리를 위한 플롯이 없고 플레이어가 자신의 목표들을 결정할 수 있는 더욱 많은 자유를 갖는다
만일 파이디아 플레이어가 승리의 규칙과 패배의 규칙들이 있는 어떤 목표를 정하면 그 즉시 이 활동은 루두스가 된다

카이와가 루두스와 파이디아를 일직선상의 양극단에 놓고 행동에 규칙이 중시되느냐 자유행동이 중시되느냐로 그 둘을 구분했던 반면에 
프라스카는 일단 루두스와 파이디아 모두 규칙이 존재하는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고 그 행동에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로 그 행동을 루두스냐 파이디아냐로 구분합니다
 –파이디아라는 더 큰 범위를 두고 그 안에 목표를 갖는 행동을 루두스로 규정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프라스카는 하나의 게임이 루두스 규칙, 파이디아 규칙을 고르게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예컨대 체스는 규칙을 가진 루두스 게임이지만 그 안에 말을 움직이는 방법을 지시하는 규칙은 게임을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닌 게임을 하기 위한 것이므로 파이디아 규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프라스카의 논의는 ‘규칙의 정도’를 가지고 루두스와 파이디아를 구분했던 카이와에 비해 ‘목표’라는 요소를 통해 좀더 명확한 분류를 했으나
카이와와 같이 여전히 하나의 게임 안에 두 가지 요소가 적용되기도 하고 본인 스스로도 외부 관찰자에게 그 둘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고 했듯이 모호한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나의 놀이 이해

저는 직업이 게임 디자이너인지라 게임 개발을 위해 놀이(게임)를 이해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놀이(게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해하고 접근하였는데
후에 시스템 사고를 접하게 되면서 보다 시스템적인 개념으로 놀이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간단히 시스템 사고에 대해 설명을 드리자면
시스템 사고란 시스템의 작동메커니즘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전략을 발견하기 위한 사고방식으로 
쉽게 말해 시스템을 이해하는 사고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사고에서는 시스템을 간단하게 행동과 구조로 구분하여 이해하는데
 –보다 자세한 설명은 http://persian8.com/2511334 참조
저는 바로 이 행태와 구조를 통해 놀이 개념을 다시 이해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루두스와 파이디아를 다시 정의해서 설명 드리고 싶기는 하지만
이미 그 의미가 정착 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저는 루두스와 파이디아 대신 게임과 플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루두스=게임', '파이디아=플레이'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일단 저는 시스템 사고에 의거하여 놀이의 행동은 플레이로 놀이의 구조는 게임으로서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놀이’는 바로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을 말합니다
이는 프라스카가 정의한 목표를 지닌 행동은 루두스, 목표가 없는 행동은 파이디아로 구분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고 
 –때문에 저는 루두스와 파이디아 대신 게임과 플레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어찌 보면 카이와가 규칙과 자유행동으로 그 둘을 구분한 것과 유사합니다

플레이(Play)
행위자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행동으로
우리가 흔히 ‘논다’라고 동사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 플레이가 됩니다

이 노는 행위에는 목표나 의지가 담길 수 있는데 이것을 이용하면 카이와가 분류한 것처럼 플레이를 분류를 할 수 있지만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능동적인 의지가 있고 
    영화나 경기를 관람하거나 놀이기구를 타는 것은 수동적이라 의지가 없지만 
    똑같이 즐거움을 주는 행위이므로 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시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게임(Game)
행위자의 구조를 이루는 룰이 존재하고 의사결정에 대한 의도된 보상과 벌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로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놀이 규칙’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게임과 게임이 아닌 것의 차이를 들자면
심시티나 심즈 같은 게임도 룰과 의사결정 그리고 그 의사결정에 대한 의도된 보상과 벌이 존재하기 때문에 게임이라 할 수 있지만 
 –상업지구를 설치했더니 세수가 늘었다거나 캐릭터에 밥을 안 먹였더니 체력이 떨어졌다 등
일반 소프트웨어는 룰과 의사결정은 존재하지만 보상과 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법이 적용되는 현실은 다른 것은 모두 존재하나 보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게임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임은 구조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지만 여기에 별도의 행동이 개입되면 하나의 체계가 완성됩니다

게임과 플레이
게임과 플레이는 그 둘이 결합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근본적으로 그 둘은 독립적인 행태와 구조이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다른 조합으로도 연결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게임(Game)은 노동(Work)이 될 수도 있고 -> Game.Work()
 –여기서의 Work는 동사로서 ‘일하다’를 의미합니다
플레이(Play)도 일(Work)에 결합될 수도 있습니다 -> Work.Play()
 –여기서의 Work는 명사로서 ‘일’, ‘직업’을 의미합니다

위의 조합인 Game.Work()는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온라인 게임 작업장 같은 것이 되어
분명 게임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놀이가 아닌 직업적인 활동이 되는 것이고
아래의 조합인 Work.Play()는 일을 놀이처럼 즐겁게 하는 것 또는 즐겁게 놀면서 돈 버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놀이’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Game.Play()가 됩니다
행태와 구조가 만나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는 것처럼
Game이라는 구조와 Play라는 행태가 만나 놀이라는 시스템이 되는 것이지요

 

결론

간단하게 정리하느라고 내용이 부실한 부분이 많지만 더 깊게 파고 드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이라 여기서 정리합니다
이 글은 놀이에 대한 이해를 이전의 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저의 생각까지를 정리한 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요한 호이징하가 놀이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최초로 했다
2. 로제 카이와가 호이징하의 접근을 발전시켜 놀이의 분류를 만들었다
3. 서사론자에 맞서는 놀이론자들이 호이징하-카이와가 이루어낸 놀이 이론을 받아들여 비디오 게임에 적용했다 
   –루두스와 파이디아
4. 나는 놀이에 대한 이전의 정의들과 시스템 사고적인 시각을 결합하여 놀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해하고 
   놀이를 행태적인 플레이와 구조적인 게임의 결합으로 정의한다

 

참고자료

컴퓨터 게임, 놀이와 서사

이전의 책 소개에서 말씀 드렸지만
'억압받은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을 읽고 몇 가지 생각이 났는데 정리해 봅니다

컴퓨터 게임은 –물론 비디오 게임도 포함하여– 두 가지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는 비디오 게임으로서의 가능성이고
그 다음으로는 인터랙티브 내러티브로서의 가능성입니다
※ 본래는 의미 전달이라는 것에서 인터랙티브 미디어로 비교하려 하다가 
   미디어 자체는 매체인 관계로 그 내용물인 놀이와는 대등한 비교가 되지 않아 
   단어를 인터랙티브 내러티브로 바꾸어 설명합니다
   단어 선택에 의해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 될 수 있으니 주의 드리면
  아래의 인터랙티브 내러티브는 이야기 전달 자체보다는 
   이야기 속의 의미 전달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해가 있으실까 다시 한 번 설명드리자면 이것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컴퓨터 게임이 놀이다 혹은 예술이다가 아니라
컴퓨터 게임은 놀이가 될 수도 있고 예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http://persian8.com/2511202
예전에 게임을 '재미'와 '의미'를 기준으로 분류해 본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냥 이렇게 분류가 되지 않을까?' 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내용을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을 읽고 명확해진 것이 있어 다시 정리합니다

보통의 게이머들이 가끔 게임을 두고 놀이냐 예술이냐 하고 논쟁을 벌이듯이
그 책에도 비디오게임으로서의 –게임학, Ludology– 게임과 인터랙티브내러티브로서의 –서사학, Narratology– 게임에 대한 논쟁이 나옵니다

루돌로지라는 용어를 널리 알린 게임학쪽 성향인 저자 곤살로 프라스카는 게임학에 기반하되 서사학을 배제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앞서 제가 쓴 글에서 나오 듯이 둘 다 동등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이 놀이이지만 서사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이 놀이일 수도 있고 서사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써 놓고도 저도 이해가 잘 안되니 그림으로 좀 더 쉽게 설명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놀이라는 것은 처음 사람이 –동물들도 놀이를 합니다만– 세상에 태어나서 하는 놀이에서부터 이후 자라나며 하는 협동 놀이나 포커나 체스, 장기 같은 카드, 보드 게임 같은 것으로 발전되어 오다가
과학 기술에 힘입어 현재의 컴퓨터 게임에까지 이르게 되어
모니터와 간단한 입력장치를 통해 이전에 비해 훨씬 다양한 놀이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컴퓨터 게임이 놀이에 기반하므로 컴퓨터 게임은 게임 플레이를 중시하여 재미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2. 

서사는 처음 구전(설화)에서 시작하여 문자(소설), 영상(드라마, 영화) 등으로 전달 방식이 발전해 오다가
역시나 과학 기술의 힘입어 기존의 시청각 영상에 컴퓨터의 인터랙티브가 더해진 형태에까지 이르게 되어
역시나 모니터와 간단한 입력장치를 통해 이전의 서사에 상호작용이 더해져 보다 다양하고 심도 깊은 내러티브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컴퓨터 게임은 인터랙티브 내러티브이므로 서사에 중심을 두어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비록 컴퓨터 게임이 게임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가지고 있는 조건만 본다면 이것은 인터랙티브 내러티브라 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컴퓨터 게임을 놀이로서 재미에 중심을 둘 것인가 서사로서 의미에 중심을 둘 것인가는 
순전히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실제로 위 책의 저자인 곤살로 프라스카는 게임학쪽 성향이지만 9.12라는 게임을 통해 의미가 중요시 되는 게임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컴퓨터 게임 자체는 그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놀이와 서사라는 평행하지 않은 두 직선이 만난 점이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이지요

균등한 불합리

며칠 전에 포커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포커에서 나오는 모든 원페어의 확률 -다른 조합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쉽게 원페어만 예로 들겠습니다-이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A원페어, J원페어가 나올 확률이나 
스페이드 A원페어, 하트 A원페어가 나올 확률이 같다는 것이지요

얼핏 생각하기에 조합이 나올 수 있는 패의 확률이 같다면 그 패들의 등급 역시 같아야 하지 않나고 생각되지만
실제 포커에서는 A원페어를 J원페어보다 높게, 스페이드 A원페어를 하트 A원페어보다 높게 쳐 줍니다

'원래 룰이 그러니 그럴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만
저는 사람들이 분명 같은 확률의 패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패를 다른 패보다 높게 쳐주는 것을 아무런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에서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돈'을 걸고 하는 도박인 포커 게임이라면 당연히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합리적'이어야 할 것인데
이런 불합리한 룰을 가지고 있다니!
게다가 이 불합리한 룰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사람 중에 이 불합리한 룰을 문제 삼는 사람이 없다니!

그것은 왜 일까요?
사람들이 이런 불합리한 룰을 몰라서?
아니면 불합리한 룰의 경우가 무시해도 될 정도로 크지 않아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여태까지 그래왔으니까?

제가 사람들을 잡고 설문조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라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겠지만
저는 이 이유를 '불합리함이 균등하게 돌아가므로' 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이아만 가지고 하고 상대는 스페이드만 가지고 포커를 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불합리하지만
상대가 스페이드를 가질 수 있는 만큼 내가 스페이드를 가질 경우가 있기 때문에 불합리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불합리함이 누구에게나 균등하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라는 것이죠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운'과 결합된 이 균등한 불합리 -내가 스페이드가 나올지 클로버가 나올지는 순전히 운이므로-가 긴장감을 높여 게임의 재미를 더해 준다는 것입니다
같은 확률의 패가 나왔을 때 '비김'이 되어 다음 승부로 넘기는 합리적인 룰보다 
약간의 '운'적인 요소에 의해 승패가 가름하는 불합리한 룰이 -물론 그 불합리함이 균등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합리적입니다 
게임에 긴장감을 불어 넣어 게임을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