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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어떤 일이든 비슷하긴 하지만, 디자인 역시 생각이 8할이다. 올바른 생각을 했다면, 그것을 실체화하는 것은 그냥 시간을 들이면 되는 일일 뿐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정량화 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닌 반면, 일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고 정량화 할 수 있는 활동이라 대개의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거꾸로 생각하게 마련이다만.

디자이너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며, 마지막으로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지식은 분야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늘 바뀌는 것이지만, 인간이나 세상에 대한 이해는 어느 분야에서나 통용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수명으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없어질 때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 사실상 고정적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한 번만 제대로 배우면 그 뒤는 쉽다. 더불어 우리가 만드는 결과물은 결국 인간과 이 세상을 위한 것이므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디자인한다면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글은 여기저기 많으니 굳이 내가 덧붙일 만한 것은 없고, 이 글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내 생각을 좀 이야기해 보겠다. 글의 주제는 단순하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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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와 유행과 디자이너

가치는 누적되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누적이다. 지식을 저장할 수 있는 수단 –문자– 의 발명 덕분에 인류의 문명은 석기를 다루던 시대에서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누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 같은 파괴적 시기를 맞이하지 않는 한 인류의 문명은 앞으로도 계속 상승할 것이고, 인류가 석기를 다루는 시대로 다시 돌아갈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명이나 지식은 가치의 예이다. 가치는 파괴 되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쌓이며, 쌓인 가치는 다른 가치의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1]

바닥에 흩어져 있는 단추를 실을 이용하여 무작위로 연결해 나갈 때 단추당 연결된 실의 비율이 1이 넘어서면 갑자기 대규모 군집이 나타나는 것처럼 –이러한 지점을 변곡점 혹은 티핑 포인트라고 한다– 가치도 일정 수준이상 쌓이면 변곡점를 맞이하여 가치가 폭발하는 시점이 생긴다. 과학사의 뛰어난 인물들이 특정 시점이나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치가 폭발하는 시점에서는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지만, 그 폭발력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기 때문에 [2]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가치 상승이 다시 완만한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그래프로 그리면 S자 모양의 그래프가 그려진다.

재미있는 점은 완만한 시기가 한동안 지속된 후 다시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여 가치가 폭발하고, 폭발력이 힘을 다하면 다시 완만한 시기에 접어들고 하는 흐름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면 계단과 같은 모양이 된다. 나심 탈레브는 역사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도약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가치가 쌓일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은 파괴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인류는 전쟁이나 광기에 의해 문명이나 지식이 파괴되는 일을 여러번 겪어 왔다. 대체적으로 가치는 우상향 하지만, 파국적인 이벤트로 가치는 절벽을 맞이하기도 한다.

 

유행은 순환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순환이다. 혁명가가 새로운 국가 –혹은 시스템– 를 건국하면 초기엔 새로운 시스템을 기반으로 융성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부패와 불평등이 쌓여 쇠락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혁명가가 나타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 –최근에 중국 기업이 한국 기업들과 달리 평등하고 합리적인 기업 문화를 갖고 있다는 글을 봤는데, 나는 이것이 미국-중국과 한국의 차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기업과 오래된 기업의 차이라고 본다. 한국에도 새로운 기업들은 평등하고 합리적인 기업 문화를 갖고 있으며 미국이나 중국의 오래된 기업은 계층적이고 경직된 구조를 갖고 있다. 더불어 나는 신생 기업들의 평등한 기업 문화가 더 합리적이다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이 글의 논의를 벗어나는 내용이므로 생략한다.

유행이라는 것도 순환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이와 같다. –물론 일반적으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순환하는 것들 중에서 주기가 짧은 것을 말한다– 어떤 새로운 유행이 인기를 끌다가 시간이 지나 인기가 수그러들면 새로운 유행이 나타나 기존 유행을 대체한다.

융성했다가 쇠락했다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것이 나타나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유행의 그래프는 Sine 함수와 비슷한 모양으로 볼 수 있다.

하나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래프는 순환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모양의 도형을 순환할 때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비가역적인– 시간 개념을 적용하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래프가 그려진다.

원형 그래프를 예로 들었지만 이것이 꼭 원형일 이유는 없다. 타원형일 수도 있고, 찌그러진 원일 수도 있고 아예 원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원이 아니라면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래프는 부드럽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모양이 아니라 ‘순환적’이라는 부분이다. 니체가 이야기한 ‘영원회귀’는 바로 이러한 세상의 순환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는 가치와 유행이 겹쳐져 있다.

인류 문명의 발전만 보면 세상은 끝없이 발전할 것 같고,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만 보면 세상은 끝없이 제자리를 돌 것 같지만, 현실 세계는 이 둘이 겹쳐져 나타난다. 우리는 누적되는 가치 위에 유행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둘이 겹쳐져 있다는 이야기는 이 둘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는 너무 복잡하므로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일단 무시한다.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에 대해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통해 단순히 제자리에서 도는 것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는데 –그림으로 그리자면 나선형 모양– 이는 기존의 회귀적인 세계관과 직선적인 세계관을 통합한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그 둘이 공존한다는 점은 나도 동의하지만, 가치가 선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선형 보다 복잡한 그래프가 그려진다고 생각한다.

 

가치는 좋고 유행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나는 가치를 유행보다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좋고 나쁨은 받아 들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면 좋고 유행이면 나쁘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세상에 적합하지 않은 가치를 –Market Fit이 되지 않는– 추구하는 것은 지나간 유행을 쫓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이다. 반면 유행을 추구하더라도 유행을 선도하는 입장에 있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 가치는 진입 –Entry– 시점이 중요하고 유행은 빠져 나오는 –Exit– 시점이 중요하다.

가치냐 유행이냐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가치와 유행과 디자이너

삶에서 가치를 따를지 유행을 따를지는 오로지 자신의 결정이다. 그러나 특정한 전문성을 요하는 역할을 맡는 사람이라면 유행 보다는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 한다.

세상에는 항상 새로운 유행이 나오기 때문에, 자신이 추구한 유행이 저물고 새로운 유행이 인기를 끌면 그간 쌓아온 것들을 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큐어모픽이나 플랫 디자인은 모두 유행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 다시 말해 인간 자체 –인지공학, 심리학, 미학, 사회학 등– 나 자신이 다루는 제품에 대한 이해에 집중한다면 유행이 아무리 많이 바뀌어도 자신이 쌓아온 것들의 가치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자신이 가치를 쌓는 만큼 가치의 수준은 높아질 것이다.


[1]: 물론 우주에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눈이 녹기 전에 새로운 눈이 내리면 눈이 쌓이는 것과 같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2]: 폭발력의 반대 방향으로 –위 예시에서는 위로 오르는 힘과 반대로 아래로 잡아 당기는– 작용하는 힘은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엔트로피 때문에 질서는 영원할 수 없지만, 무질서는 영원할 수 있다.

디자인, 디자이너

내 직업적 정체성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가끔 계신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나는 나의 직업적 정체성이 ‘디자이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한데, 내가 가진 프로그래밍이나 기타 여러 능력들이 보잘 것 없는 수준인 반면 내가 가진 디자인 능력은 나의 다른 능력들에 비해 몇 배는 낫기 때문이다.

나의 직업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함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한다’는 격언에 따라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몇 번의 글을 통해 정리해 보겠다.

디자인

나는 어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을 두 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퍼뜨릴 어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만든 가치를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면 제품 개발은 전자에 마케팅은 후자에 대응 시킬 수 있을 것이고, 학자가 하는 일이라면 연구를 통해 지식을 만드는 일을 전자에 책이나 논문으로 출판하는 것 후자에 대응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치를 잘 만들었으나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나, 사람들에게 퍼뜨리기는 잘 하지만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것을  퍼뜨리는 것 모두 좋은 결과를 이루기는 어렵다. 좋은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을 모두 잘해야 비로소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가치를 만드는 일은 다시 가치를 구성하는 과정과 그것을 실체화 하는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나에게 디자인이란 ‘가치를 목적에 맞게 구성하거나 발전시키는 과정’의 일을 의미한다. –프로그래밍이나 아트 같은 작업은 구성된 가치를 실체화 하는 과정의 일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디자인을 문제 해결에 비유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옳다고 생각하는데 가치를 구성해 내지 못하는 문제 해결은 그저 문제 풀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 문제 잘 푸는 사람을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디자인을 ‘설계’에 대응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만 옳다고 생각하는데, 디자인이 실체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기는 하지만 한 번 계획을 세운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화된 결과물을 보고 꾸준히 개선하는 과정 자체를 디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가치를 실체화 되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 어떻게 동작할지에 대한 것 등– 의 일이며 디자인의 가치는 오로지 실체화된 결과물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디자인의 가치가 실체화된 결과물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디자인을 하려면 디자인을 일단 실제 결과물로 만들고 이를 개선 하여 다시 만들고 이를 다시 개선하고의 과정 –때로는 밥상 뒤엎기도 해야 한다– 을 끊임 없이 거쳐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필휘지의 명필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한 한 번에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며 끊임 없이 피드백을 받으며 디자인을 발전시켜야만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을 오래도록 쌓아가면 언젠가는 디자인에 있어 일필휘지의 명필 수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선 그림을 많이 그려봐야 하는 것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 별로 복잡해 보이지 않는 루이스를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했는지 알면 다들 놀랄 것이다. 솔직히 나 스스로도 놀랐다.

디자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좋은 디자이너라면 가치를 구성 하거나 발전 시킴에 있어 눈에 보이는 부분을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행태는 구조에서 비롯한다. 구조에 대한 이해와 개선 없이 행태에 초점을 맞춘 가치는 일시적일 뿐 지속성이 없다.

디자이너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디자인은 디자이너만 하는 것이 아니며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축구 경기에서 수비수라고 수비만 하거나 공격수라고 공격만 하지 않는다. 수비수도 공격 상황이 되면 올라가서 공격에 가담하고, 공격수도 수비 상황이 되면 내려와서 압박을 돕는다. 수비수가 수비만 하고 공격수가 공격만 하는 팀은 망한다. 모든 팀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훌륭한 팀이 된다.

공격수가 공격을 책임지고 수비수가 수비를 책임지 듯,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디자인 과정에는 모든 팀원이 함께 해야 한다. 다양한 피드백이 디자인을 더 좋게 만들 듯이 다양한 역할을 하는 다양한 팀원들의 시각이 더해질 때 디자인은 더욱 좋아진다.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이 디자인에 참여 하듯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이 아닌 일에도 참여 해야 한다. 간단한 스크립트 작업을 통해 프로그래머의 일을 덜어주는 것이 그 한 예인데, 이는 프로그래머가 디자이너의 자잘한 요구 사항을 모두 구현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기능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프로젝트의 효율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빠르게 확인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이 내용을 ‘디자이너는 프로그래밍을 배워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글을 쓸 예정이다.

제품을 디자인 하는 것만 디자인이 아니다. 디자인은 어느 작업에나 녹아 있다. 프로그래머나 아티스트가 자신의 결과물을 개선하는 과정도 분야와 층위는 다르지만 일종의 디자인이다. 이미 누구나 디자인을 하고 있으며, 디자이너 또한 디자인이 아닌 일을 한다. 현실 세계의 일이 늘 그러하듯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디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작업은 많은 경우에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게 마련이다. 어쨌든 기능이 갖춰지면 제품은 완성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조직에서 디자인에 투입하는 비용은 아끼게 되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디자이너라도 이미지를 다루거나 스크립트를 다루는 것과 같은 눈에 보이는 일을 하는데 역량을 집중하여 형편 없는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문제는 디자인의 가치를 이해 못하는 리더의 문제에 가깝지만 개별 디자이너들 역시 자신의 핵심 역량은 겉으로 드러나는 스킬셋이 아닌 디자인 자체에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